상투를 튼 두 사람이 씨름판에서 숨 가쁜 대결을 하고 있다. 씨름꾼들을 둘러싼 관람객들이 모두 경기에 집중하는 가운데, 두 사람만 딴 곳을 쳐다보고 있다. 한 사람은 관람객을 살피는 엿장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엿장수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다. 엿을 팔아야 하는 엿장수가 관람객을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꿀처럼 단 엿에만 한눈을 파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의외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는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1745∼?)의 대표작 단원풍속화첩 중 ‘씨름’의 장면이다. 단원풍속화첩은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을 모아놓은 화첩으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돼 있다. 최근 신간 ‘김홍도 새로움’(사진)을 펴낸 정병모 한국민화학교장(전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은 “김홍도 풍속화에는 단순한 풍속의 묘사를 넘은 유머와 풍자가 드러난다”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 하나 허튼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림의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했다.
신간은 스토리텔러로서의 김홍도의 창의성과 휴머니즘에 집중한다. 단원풍속화첩의 또 다른 그림 ‘길쌈’의 경우 베를 짜는 여인만 보면 평범한 풍속화처럼 보이지만, 등 뒤에 손자를 업고 서 있는 시어머니의 표정에 집중하면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읽을 수 있다. 한마디 할 기세로 못마땅한 얼굴을 한 시어머니는 해맑은 표정의 손자와 대조돼 강한 인상을 남긴다.
화가인 김홍도에게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내는 ‘연출자’로서의 능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신간의 책 표지로 사용된 ‘염불서승’ 역시 평범하지 않다. 연화대에 앉은 스님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척추뼈의 일종인 청량골(淸凉骨)을 바짝 세우면 드러나는 두 줄기의 긴장된 목선을 잡아냈다. 긴장된 목덜미와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어우러져 우주적인 숭고함이 느껴진다. 보일락 말락 한 작은 점으로 그린 오른쪽 눈썹 끝은 고뇌하는 스님의 앞모습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신간에선 왕의 어진부터 촌부의 얼굴까지 두루 그린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풍부히 맛볼 수 있다. 정 교장은 “김홍도는 무엇을 그려도 색다르게 표현한 화가로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주목했다”며 “기존 유교의 도덕적 측면에 주목한 그림과 달리 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 세계를 열어간 위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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