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역사왜곡 논란]
역사왜곡 논란 휩싸인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팩트체크
원정왕후가 정전서 원성왕후 추궁… “왕후가 정전 출입, 사실과 먼 설정”
현종, 강감찬과 갈등에 말 타다 낙마, “사료에 없어… 이성계 모티브 삼은듯”
‘역사왜곡 막장 전개. 이게 대하사극이냐?’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 앞. 디씨인사이드 갤러리 회원들이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성토하는 문구의 전광판을 실은 트럭을 보내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11월부터 방영 중인 이 드라마는 고려와 거란이 벌인 2, 3차 여요전쟁(1010년 및 1018∼1019년)을 다루고 있다. 일일 최고 시청률이 10%를 넘는 등 인기를 끌고 있지만, 17∼20회에 걸쳐 고려 조정의 내부 갈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졌다. 원작 소설을 쓴 길승수 작가도 “드라마가 원작에 충실하지 않아 역사를 왜곡했다”며 제작진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문가들은 “일반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며 “작가나 제작진이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려거란전쟁’의 세 가지 주요 논란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역사학자들은 극중 지방제도 개편을 놓고 현종(김동준 분)과 호족이 대립하는 장면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호족의 힘을 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5도 양계와 4도호부, 8목을 설치한 지방제도 개편이 골격을 갖춘 건 3차 여요전쟁(귀주대첩) 당시인 1018년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이를 2차 전쟁 직후로 앞당겨 갈등을 과장했다는 것. 허인욱 한남대 사학과 교수는 “나라의 온 힘을 모아도 힘든 상황에서 현종이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는 설정은 과했다”고 말했다.
고려사 등에 따르면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시험과 노비안검법(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법)을 도입한 건 광종(재위 949∼975년)대다. 길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드라마에선 마치 광종 시대의 일을 현종 때 벌어진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극중 왕후 간 갈등은 조선시대 사건을 단순 대입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드라마에서 현종의 첫 번째 왕후인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를 견제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문제는 원정왕후가 병석에 있는 현종을 대신해 정전(正殿)에 들어가 김은부와 그의 딸 원성왕후를 직접 추궁하는 장면. 수렴청정도 아닌데 왕이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정전에 왕후가 출입하는 행위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설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고려사 전공 교수는 “왕이 거란에 쫓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마당에 왕후들이 궁중 암투를 벌일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현종의 지방제 도입 장면도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는 “고려시대에도 군현제가 있었지만 모든 군현에 관리가 파견된 건 조선시대 들어와서다”라며 “극중 현종의 지방제 개혁 장면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행적에 가깝다”고 말했다.
극중 현종이 강감찬(최수종 분)과 갈등을 벌인 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타고 질주하다 낙마하는 장면을 놓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현종 비하’ 지적이 나왔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전기 문신 최충(984∼1068)은 현종을 “가히 중흥을 이룬 군주”라며 높게 평가했다. 이진한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현종의 낙마는 고려사 자료에 전혀 없는 사실”이라며 “이성계가 공양왕 말년에 낙마한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작가나 제작진이 사극 제작에 앞서 사료를 깊이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소설가 아베 류타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다룬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 학계 최신 이론과 답사자료를 엮은 중간 보고서를 최근 책으로 발간했다. 기경량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창작자들이 역사 고증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쉽다”며 “퓨전 사극뿐 아니라 고증에 신중을 기울이는 정통사극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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