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극에 사용되는 인형을 괴뢰(傀儡·꼭두각시)라고 한다. 당나라 양굉(梁鍠)은 꼭두각시 공연을 본 뒤 다음과 같이 읊었다.
중국에선 일찍부터 ‘괴뢰희(傀儡戱)’라고 불리는 인형극이 발달했다. 주(周) 목왕(穆王) 때 언사(偃師)가 만든 인형은 사람과 똑같이 노래하고 춤출 수 있었다고 한다.(列子, ‘湯問’) 시인이 본 인형극은 노인을 주연으로 인생 문제를 다뤄 관객으로 하여금 인생무상의 감회를 갖도록 한 것인 듯하다.(런중민, 唐戱弄)
시에서 읊은 나무 꼭두각시는 노인 형상만 빼고 본다면 피노키오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카를로 콜로디가 쓴 ‘피노키오’의 원제도 ‘어느 꼭두각시 인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위 시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당나라 현종이 아들 숙종에게 선위한 뒤 태극궁(太極宮)의 감로전(甘露殿)에 유폐되었을 때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明皇雜録) 현종은 황제로 등극하여 한때 나라를 융성시키기도 했지만, 며느리였던 양귀비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안녹산의 난으로 몰락했다. 현종은 죽은 양귀비를 그리워하다 외롭게 최후를 맞았다고 하는데, 한때 절대권력자였던 그가 공연 뒤 버려진 꼭두각시 같은 처지로 전락했음이 시에 드러난다.
피노키오에 관한 다른 시각의 영화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피노키오’(2022년)가 있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색다른데, 감독이 앞서 연출한 ‘악마의 등뼈’(2001년)나 ‘판의 미로’(2006년)처럼 알레고리를 통해 파시즘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영화 속 독재자 무솔리니는 피노키오가 자신을 전쟁광 똥쟁이라고 희롱하는 내용의 공연을 보고 격분한다. 피노키오는 불의한 전쟁에 꼭두각시처럼 이용되길 거부한다.
예나 지금이나 꼭두각시란 말은 남의 조종을 받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은 이 시를 이어받아 우리네 삶도 인형과 같아서 다른 사람의 조종을 받으며 덧없이 떠돈다고 읊었다.(‘題前定録贈李伯牖’) 영화 속에서도 파시스트 시장이 줄도 없이 움직이는 피노키오에게 누가 조종하냐고 추궁하자 피노키오는 그런 당신은 누가 조종하냐고 되받아친다.
원작에서 피노키오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사는 것에 지쳐서 착한 소년이 되고 싶어 한다. 소년이 된 피노키오는 자신이 꼭두각시였을 때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를 돌이켜보며 이제 누구에게도 조종받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반면 시인은 꼭두각시를 서글프게 바라보며 세상이란 줄에 매달려 조종당하다 버려진 덧없는 인생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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