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머리’에서 휴가를 보내다.” 한국말로 들으면 그리 근사하지 않은 문장. 허나 태국어로 바뀌는 순간 마법이 펼쳐진다. 돌머리는 태국 말로 ‘후아힌(Hua hin).’ “태국 왕실 휴양지”로 유명한, 북부 말레이반도 인구 8만여 명의 도시를 일컫는다. 하긴, 휴가기만 하다면야 어디인들 어떠랴.
자그마한 어촌이던 후아힌은 1921년 철도청장이던 한 왕자가 기차역 호텔을 세우며 확 달라졌다. 특히 이후 라마7세가 여름별장을 지으며 본격적인 왕실 휴양지로 명성을 얻었다. 별장명도 멋들어진다. ‘끌라이깡원(Klai Kang Won).’ “근심으로부터의 해방”이란다.
후아힌은 방콕에서 남으로 약 200km 거리. 차로 2~3시간 달리노라면, 왕도 놓고 왔다는 걱정거리가 스멀스멀 사라진다. 태국은 1년 내내 무덥지만, 겨울엔 건조한데다 기온도 다소 낮아 쾌적하다. 골프 같은 야외활동이 주목적이라면 후아힌은 탁월한 선택이다.
실제로 후아힌은 겨울철 전지훈련 명소다. 올해 초 프로축구팀 FC서울과 부산아이파크가 여기서 구슬땀을 흘렸다. 최근 골프 아시안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 최종전도 열렸다. 태국관광청 초청을 받아 한국인들이 관심 많은 골프장들을 중심으로 후아힌을 둘러봤다.
●반얀 골프 클럽
한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후아힌 골프장은 ‘블랙마운틴.’ 미국 월간지 골프다이제스트가 2012년 뽑은 ‘비(非)미국 골프장 100선’에 오른 명문이다. 한데 명성만큼 인기도 많아 평일도 부킹이 쉽질 않다. 행여 예약이 안 되도 너무 아쉬워 말자. 후아인엔 블랙마운틴 버금가는 골프장이 여럿이다. 현지에선 반얀(Banyan) 골프 클럽이 더 낫다는 이들도 상당하다.
파인애플농장 자리였다는 반얀은, 이름처럼 근사한 반얀트리(벵갈보리수)들을 위시한 ‘자연미’가 끝내준다. 클럽하우스로 들어서 싱그러움으로 눈이 부신 전경만 봐도, 왜 이곳이 태국 10대 골프장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지 수긍이 간다. 세련된 식당 역시 맛깔 나는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해 만족도가 높다.
반얀은 한국 골퍼라면 필드가 친숙할 수도 있다. 페어웨이 잔디가 ‘러쉬 조이시아(Lush Zoysia)’로 한국 금잔디와 같은 종이다. 공을 야무지게 받혀줘 치다 실수할 확률이 낮은 편. 그렇다고 스코어를 안심해도 좋단 얘긴 아니다. 어딜 가도 점수 나쁠 이유가 우린 101가지쯤 있지 않나.
시그니처 홀은 파3 15번 홀. 클럽 측은 “티박스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오션 뷰를 놓치지 마라”고 소개했다. 허나 어쩌랴. 아일랜드 그린에 공을 올릴 수나 있을지 끙끙대느라, 저 너머 풍광이 어떤지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개인적으론 파5 12번 홀도 인상 깊었다. 태국에서 흔치 않은 오르막 코스로, 헉헉대며 그린까지 공을 올리니 나름 성취감이 밀려왔다. (쓰리 퍼팅으로 행복은 금방 시들었다.)
태국 골프코스 디자이너 리파폰 나마트라가 설계했다는 반얀은, 어딜 가도 숲과 바다가 어우러져 “이 맛에 외국 나오지”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코스 역시 어느 한 홀도 싱겁지 않고 아기자기하다. 2008년 10월 오픈한 뒤 명품시계 롤렉스가 선정한 ‘세계 골프코스 톱 1000’에도 이름을 올렸다.
● 스프링필드 로열 컨트리클럽
1993년 세워진 스프링필드(Springfield)는 곳곳에서 친숙한 얼굴 사진을 마주한다. ‘골든 베어(golden bear)’ 잭 니클라우스(84)다. 기존 18홀을 그가 디자인했는데, “챔피언십 코스의 높은 기준에 부합하면서도, 어떤 수준의 골퍼도 즐길 수 있는 편안함”(골프아시안 닷컴)이 장점이라 알려졌다. 2005년 추가로 만든 9홀은 미 유명 골프코스 디자이너 리 슈미트가 설계했다.
미 월간지 골프매거진에 따르면 니클라우스 코스는 일반적으로 드로우를 구사하는 골퍼에게 유리하다. 페이드로 친 공은 ‘무시무시한’ 벙커와 워터해저드를 만날 각오를 해야 한다. 스프링필드도 확실히 오른쪽에 난관이 많이 도사렸다. 물론 ‘스트레이트’로 치면, 거리는 대체로 길지 않아 확실한 보상을 안겨준단다. 누군 똑바로 치고 싶지 않아 갈팡질팡했을까.
스프링필드는 첫 홀에 서면 쭉 뻗은 심플한 전망에 안도감이 든다. 실제로 태국 골프장들은 웬만하면 ‘오비(OB·out of bounds)’가 없어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그린이 빠른데다, 은근한 언듈레이션(굴곡· undulation)에 애를 먹는다. 시그니처 홀은 파5 18번 홀. 드라이버 거리가 좀 나는 이들은 세컨샷부터 벌써 그린이 확 눈에 들어와 반갑다고. 하지만 주의하시길. 보기보다 거리가 먼 데다 심지어 아일랜드 그린이다. 자칫 기대는 찰나에 탄식으로 바뀐다.
코스도 좋지만 부대시설도 잘 갖춰져, 블랙마운틴이나 반얀보다 ‘가성비’가 좋다는 후기들이 많다. 골프&리조트 총괄매니저도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골프 등을 즐기려 장기 투숙하는 한국인들이 꽤 많다”고 했다. 다양한 프로모션을 이용하면 당연히 가격도 착해진다.
● 레이크뷰 골프 클럽
레이크뷰(Lakeview)는 후아힌에서도 가장 근사한 경치를 지닌 골프장으로 평가받는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깽끄라찬(kaeng krachan) 국립공원’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36홀로 구성된 골프코스는 어딜 가도 아름다운데, 9홀마다 컨셉이 조금씩 다른 게 독특하다.
클럽 측에 따르면 기존 18홀은 전반 ‘마운틴 A’와 후반 ‘레이크 B’로 나뉜다. A는 산세가 심한 건 아니고, 무성한 나무와 굴곡 있는 페어웨이가 특징. B 코스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나 이름처럼 ‘퐁당’의 아픔이 만만찮다. 파3지만 거리가 긴 3번 홀과 14번 홀이 어렵다.
2006년 문을 연 신규 코스는 ‘데저트(사막) 스타일’과 ‘스코티시 스타일’로 구분 짓는다. 진짜 사막 같은 건 아니지만, 곳곳에 도사린 벙커만 오가다보면 모래 위에서 치는 거나 진배없을 터. 스코티시는 “딱 보면 스코틀랜드가 떠오른다”는데 경험이 없어 뭔지 모르겠다.
1월 말 방문했을 때 코스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시안 투어 퀄리파잉(Q)스쿨 대회 직후였다는데, 그렇다면 이용객을 받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후아힌 도심에서 상당히 멀어서 오고가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팜 힐 골프 클럽
1992년 문을 연 팜 힐(Palm Hill)은 후아힌에서 가장 처음 생긴 국제기준 골프코스라고 한다. 수백 그루가 우거진 야자수만 봐도 흐뭇한데, 향수 원료로 유명한 푸루메리아 나무와 보랏빛 꽃망울이 어여쁜 부겐빌리아까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국 풍경이 펼쳐진다.
미 유명 골프코스 디자이너 맥스 웨슬러가 설계한 팜 힐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코스가 특징이다. 싱가포르 골프지 아시안골프는 “전반부는 정원 속을 거니는 기분을, 후반부는 태국 만(灣)을 가슴에 품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9홀만 치는 바람에 바다는 품어보질 못했다.
10번부터 14번 홀은 팜 힐의 자랑거리. 아름다우면서도 정교한 샷을 요구해 골퍼들의 만족도가 크다고 한다. 시그니처 홀은 11번인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3에서 버디를 노려보라”는 안내가 나와있다. 전체적으로 그린은 후아힌에서도 특히 빠른 편에 속했다.
방문한 날만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유독 서양 방문객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띄었다. 미 캘리포니아 고급 컨트리클럽에 온 기분마저 들었다. 활력 넘치는 분위기가 감돌아 외향적인 골퍼들이 좋아할 듯하다.
●그 밖의 즐길 거리
휴양지 성격이 강한 후아힌은 관광 명소가 많진 않다. 하긴 주변이 온통 근사한 바다와 숲인데 뭐가 더 필요할까. 그래도 후아힌 기차역은 들러봄직하다. 후아힌 소개 사진이나 영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랜드마크다.
영국 BBC가 지난해 ‘세계에서 주목할만한 기차역 톱 5’ 로도 꼽았던 이곳은 1911년 세워진 태국 최고(最古)의 기차역이다. 크기는 간이역 정도로 소담하지만, 태국 전통 건축방식과 서구 빅토리아 양식이 혼합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배가 있다면 무심코 ‘기차와 소나무’가 흥얼거려 질지도.
후아힌 야시장은 데차누칫 거리에 있는 노점 행렬이 가장 유명하다. 100m 쯤 되는 거리를 좌우로 가득 메운 길을 어깨가 맞닿으며 걷다보면, 태국의 진짜 냄새가 물씬하다. 바닷가답게 해산물 식당과 군것질 노점이 많아 침샘을 꼬집는다. 상품들은 싸지만 조악한 편이나, 150바트(약 5500원)에 양질의 티셔츠를 건지는 묘미도 숨어있다. 노점상이 그득한데도 억지스레 호객하지 않는 차분함도 맘에 들었다.
태국에 왔으면 마시지도 거를 순 없다. 가게마다 다르겠지만, 깔끔한 시설을 갖춘 샵도 500바트(팁 100바트 정도 추가)면 1시간가량 정성 가득 주물러준다. 요즘 동남아에서 마사지는 필수코스지만, 베트남과 태국은 지향점이 다소 다른 성싶다. 베트남이 따뜻한 차를 한입 머금은 듯 노곤해진다면, 태국은 막힌 속 뻥 뚫리는 청량음료를 들이킨 기분이랄까. 라운딩 직후 방문이라면 태국 손을 살포시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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