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어머니에게 고백한 불륜이 생전에 못한 일 이루는 계기로…
치매 앓아가며 처절하게 쓴 작품… 마르케스 “절대 출판 말라” 유언
사후 10주기 맞춰 세계 동시 출간… 유족 “독자 기쁨 위해 뜻 어겼다”
◇8월에 만나요/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184쪽·1만6000원·민음사
“술 한잔 초대해도 될까요?”
중년여성 아나 막달레나 바흐는 호텔 바에서 한 남자에게 이런 제안을 받는다. 아나는 결혼한 지 27년 된 평범한 주부. 남편은 유명한 음악가고, 번듯한 자식 둘을 뒀다. 그러나 이날 아나는 홀로 카리브해의 섬으로 여행을 와 있다. 어머니의 기일인 8월 16일에 맞춰 섬에 있는 어머니의 묘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아나와 남자는 브랜디를 마시며 달콤한 대화를 나눈다.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1847∼1912)의 소설 ‘드라큘라’에 대한 평가를 나누며 취향을 확인한다. 프랑스 음악가 클로드 아실 드뷔시(1862∼1918)의 곡 ‘달빛’을 볼레로 스타일로 편곡한 연주를 함께 감상한다. 밤 11시 호텔 바가 문을 닫는다. 아나는 남자의 크고 노란 눈을 바라보며 “올라갈까요?”라고 말한다. 남자가 망설이자 아나는 명확하게 유혹한다. “2층 203호, 계단 오른쪽이에요. 문 두드리지 말고 그냥 밀고 들어오세요.”
장편소설 ‘백년의 고독’ 등 중남미를 대표하는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의 유작 소설이다. 마르케스의 사후 10주기에 맞춰 전 세계에 동시 출간됐다.
신간은 중년 여성의 일탈을 다뤘다는 점에서 언뜻 ‘막장 드라마’처럼 보인다. 첫 불륜을 저지른 아나는 다음 해에는 다른 남성과 밤을 보낸다. 다만 아나는 집으로 돌아온 뒤엔 죄책감에 시달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냐”는 남편의 추궁에 가슴을 떤다.
불륜은 아나가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담기 위한 장치다. 아나는 어머니의 묘지 앞에서 자신의 불륜을 털어놓는다. 생전 매번 어머니와 다투던 아나지만, 이제 죽은 어머니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됐다. 소설 막바지엔 아나가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아나와 어머니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절친’이 된 셈이다. 아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모든 걸 이해해요. 어머니는 섬에 묻히기로 마음 먹었을 때 이미 유일하게 모든 걸 이해한 분이에요.”
신간은 마르케스가 처음으로 주인공을 여성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이 때문에 역자는 마르케스의 글을 자주 읽던 어머니가 소설 집필에 영향을 끼친 것 아니냐고 해석한다. 죽음이 다가온 마르케스가 소설을 통해 세상을 뜬 어머니를 기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소설엔 마르케스가 사랑했던 음악을 찾는 묘미도 있다. 주인공 아나의 이름은 독일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두 번째 아내와 이름이 같다. 무인도에 가게 되면 바흐 음악을 가져가고 싶다고 했던 마르케스답다.
마르케스의 유언을 거스르고 출간된 점도 흥미롭다. 소설은 1999년 주간지에 1장이 발표됐지만 이후 전체 작품은 발표되지 않았다. 마르케스는 치매에 시달리며 이 작품을 처절하게 썼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 두 아들에게 “원고를 찢어버리고 절대 출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신간 출간이 결정되자 두 아들이 경제적 이유로 출간을 결정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다. 이를 의식했는지 두 아들은 신간에 “독자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어겼다”고 썼다.
마르케스가 하늘에서 출간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까, 분노할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경우처럼 작가의 의도에 반해 출간된 작품이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는 경우가 왕왕 있다. 독자로선 ‘가보’(마르케스의 애칭)의 귀환이 반가울 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