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도시 도쿠시마(德島)에서 ‘최후의 심판’ 감상이라…. 조잡한 축소판이겠거니 했다. 최후의 심판은 이탈리아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다. 거장 미켈란젤로가 7년 작업 끝에 1541년 완성한 167㎡ 크기 대작이다. 재현이 가능키나 할까.
예측은 빗나갔다. 오쓰카 국제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원작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재현해 놓았다. 시스티나 성당을 통째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도쿠시마는 한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아니다. 위치를 잘 모르는 일본인도 많단다. 소도시라기보다는 정겨운 시골에 더 가깝다. 하지만 성큼 발을 디뎌보니 도쿠시마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 하이라이트가 오쓰카 국제 미술관이라고나 할까. 짧은 여행의 끝은 무척 아쉬웠다.
● 소도시에서 누리는 ‘예술 호사’
인천공항에서 1시간 20분 남짓. 시코쿠(四國) 다카마쓰(高松) 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동쪽으로 차를 달렸다. 봄을 시샘하는 듯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그래도 햇살은 따스했다.
1시간 10여 분 후. 올해 개관 25주년을 맞은 오쓰카 국제 미술관에 도착했다. 웅장한 건물에 먼저 놀랐다. 가이드북을 보니 일본 최대 규모(연면적 2만9412㎡) 상설 전시 공간이란다. 둘째, 비싼 입장료(3300엔)에 놀랐다. 물론 관람을 끝낸 후에는 값어치를 인정하게 되지만.
오쓰카 국제 미술관은 총 5개 층에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눠 서양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세계 26개국, 190여 미술관이 보유한 작품 중에서 1000여 점을 골라 실물 크기로 재현했다. 작품은 캔버스가 아닌 도자기 타일에 구현됐다. 영구적으로 보관하기 위해서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시리즈,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일반인이라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품 대부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성당 벽화 작품의 경우 성당 내부까지 오롯이 재현했다. 모든 작품을 감상하려면 최소한 1시간 20분은 필요하다. 사진 촬영은 가능하다. 살짝 작품을 터치하는 것도 괜찮다. 타일이기 때문에 손상될 우려가 없어서 허용한단다.
● 신비로운 바다의 소용돌이
미술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나루토(鳴門) 해협이 있다. 세계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해류가 흘러드는 곳이라는데, 유입된 해류가 반대편 해류와 섞이며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걸로 유명하다. 소용돌이는 봄과 가을 썰물 때 가장 선명하다. 지름이 최대 20m까지 커진단다. 나루토 해협도 도쿠시마 여행에서 빠뜨려선 안 될 명물이다.
소용돌이를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우즈노미치 전망대를 이용한다. 이 전망대는 도쿠시마와 인근 아와지섬을 잇는 다리 오나루토교(橋) 하단에 설치돼 있다. 해수면에서부터 45m 높이에 총길이 450m로 만들어졌다. 유리 바닥을 통해 소용돌이를 관람할 수 있다.
둘째, 유람선을 탄다. 유람선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지점까지 간다. 바로 눈앞에서 소용돌이를 목격할 수 있다. 30∼40명이 타는 소형 페리를 타면 소용돌이를 뚫고 지나가는 체험도 가능하다. 배가 심하게 요동쳐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멀미에 약하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그 경우 대형 유람선을 추천한다.
기자는 두 방법 모두 체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대한 소용돌이를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날따라 강하게 불던 바람 때문이다. 엽서에 실린 소용돌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담 하나.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 주인공 나루토는 이 해협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가 만든 캐릭터다. 나루토의 필살기가 소용돌이인 게 이런 이유에서라나.
● 시코쿠 전통문화 체험도 가능
“앗토사!” “앗토앗토!”
배우들이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영차’나 ‘으라차차’와 비슷한 감탄사다. 덩달아 관객들 어깨도 들썩거렸다. 아와오도리 회관에서는 일본의 대표적 축제인 ‘아와오도리 축제’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아와오도리 축제는 매년 8월 12∼15일 열리는 거리 축제다. 사람들은 아와오도리 춤을 추며 거리를 행진한다. ‘아와’는 도쿠시마의 옛 지명, ‘오도리’는 춤을 뜻한다. 아와오도리 춤은 맑은 날을 기원하는 군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농악과 느낌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랐다. 흥겨운 2박자 리듬에 특유의 손동작을 반복한다.
40분 공연은 3부로 구성돼 있다. 배우들은 먼저 15분 동안 1부 공연을 펼친다. 이어 15분 동안 관객에게 춤을 가르쳐 준 뒤 모두 무대로 끌고 가서 한판 춤판을 벌인다. 마지막으로 10분 동안 배우들의 3부 공연이 진행된다. 이처럼 도쿠시마에는 일본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많다. 일본 전통 인형극 체험도 가능하다. 골목에 있는 작은 극장에 가면 애끊는 모정을 주제로 한 인형극을 볼 수 있다. 무대 상단에 영어 자막이 나와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세 명이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사람 3분의 2 크기 정도인 인형을 움직이는 방식이 이색적이다. 인형 2개가 무대에 나오니 6명의 ‘검은 배우’가 인형을 조작했다. 엉킬 법도 하건만 깔끔하게 무대를 마쳤다. 인형극이 끝나면 직접 인형을 움직여 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공연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일본 전통 천연염색 공방이 있다. 여러 무늬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 직접 손수건에 쪽빛 물을 들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 88개 사찰 순례의 출발점
도쿠시마에는 료젠지(靈山寺)라는 사찰이 있다. 10분이면 절 내부를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하지만 이 절은 일본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8세기경 일본 불교 종파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空海)가 이 절에서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고보(弘法)대사 시호를 받을 정도로 ‘거물’이 된다.
시코쿠섬 전역에는 88개 사찰이 있다. 료젠지에서 출발해 이 모든 사찰을 도는 순례가 유명하다. 기자가 들렀던 날에도 여러 명의 순례자가 삿갓을 쓰고 순례에 나서고 있었다. 사찰들을 연결한 순례길 총길이는 1400km에 이른다.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잠시 명상하듯 걷는 것도 괜찮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여행에서 먹거리가 빠질 수는 없다. 도쿠시마 전통 라멘을 먹어봤다. 다른 지역과 달리 고기를 양념에 조려 면에 얹는다. 또 날달걀도 고명으로 올린다. 국물색이 진한 갈색을 띤다. 한국인 입맛에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도의 한 휴게소에서 ‘식사 플렉스’를 해 봤다. 성게알과 연어알, 참치가 잔뜩 들어 있는 덮밥(3300엔·약 2만9000원). 솔직히 한 끼 식사로는 비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음식이기에 먹어 봤다. 부드러운 성게알과 톡톡 터지는 연어알, 그리고 해산물 향기들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런 식사만으로 여행의 즐거움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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