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활의 나라다. 한국 양궁 대표팀은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27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로 모두 합해 43개의 메달을 땄다. 세계 어떤 나라도 올림픽에서 이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한국은 총의 나라다. 한국 사격 대표팀은 역대 올림픽에서 모두 7개의 금메달을 합작했다. 은메달 9개, 동메달 1개를 합하면 올림픽 메달 개수는 17개나 된다.
대한민국은 또 칼의 나라이기도 하다. 펜싱은 최근 들어 한국 대표팀의 대표적인 메달밭이 됐다. 한국 펜싱 대표팀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따낸 데 이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각각 금메달 1개씩을 추가했다. 최근 세 대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을 딴 종목은 양궁과 펜싱밖에 없다.
저출산 여파로 국내 대부분 종목들이 선수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펜싱은 예외다. 곳곳에서 펜싱클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운영 중인 펜싱클럽은 100개를 훌쩍 넘는다. 지금도 여러 곳이 문을 열 채비를 하고 있어 수강생들을 가르칠 코치가 부족하다.
펜싱부가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370곳이 넘는다. 중고 대회가 열릴라치면 선수와 지도자들을 합쳐 2000여 명이 한곳에 모인다. 여기에 학부모들도 비슷한 숫자가 따라온다. 여기에 펜싱은 내년부터 소년체전 정식 종목이 된다. 이에 따라 펜싱부를 창단하는 학교나 클럽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펜싱은 비인기 종목 중의 비인기 종목이었다. 선수층은 얇았고, 펜싱클럽이라는 건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당시 펜싱은 종주국인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나 하는 ‘고급’ 스포츠였다.
하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김영호 한국중고펜싱연맹 회장(53)이 그 대회 남자 플뢰레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게 결정적이었다. 김영호의 금메달은 대한민국 펜싱 사상 최초의 금메달이자 아시아 남자 펜싱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단체전 은메달 후 이듬해부터 약 6년간 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김영호는 “예전엔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선수들의 꿈이자 목표였다. 그런데 내가 시드니에서 금메달을 딴 후 후배들의 눈빛이 달라졌다”며 “선수들은 올림픽이라는 더 큰 꿈을 향해 죽기살기로 노력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SK그룹이 2003년부터 펜싱협회 회장사를 맡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펜싱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 펜싱의 올림픽 첫 금메달은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다. 김영호 본인이 말하는 전성기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가 아니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회전에서 탈락한 김영호는 애틀랜타 대회 때 메달을 기대봤다. 8강전에서도 30초를 남겨두고 13-11로 앞서고 있었다. 4강 상대는 김영호가 이전에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선수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파고든 방심이 역전패의 원인이 됐다. 그는 “경기 중 메달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좀 전까지 크게 보이던 상대 선수가 손가락만하게 보이더라. 결국 자만심 때문에 패하고 말았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한 김영호는 은퇴까지 생각했다.
약 2개월간 놓았던 칼을 다시 잡은 김영호에게 반전의 무대가 된 건 1997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남아공은 멀고 먼 나라였다. 한국 선수단은 2박 3일간 비행기를 5번 갈아타고 겨우 남아공에 도착했다.
딱히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단은 대회 하루 전 버스를 빌려 희망봉엘 갔다. 다들 “죽기 전에 언제 다시 여기 와 보겠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희망봉에 함께 오른 김영호는 달랐다. 그는 “생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번 대회, 나아가 다음 올림픽에서 꼭 좋은 성적을 내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기도가 효과가 있었던지 그 대회에서 김영호는 깜짝 은메달을 따냈다. 결승에서 1-10으로 뒤지다 14-14 동점을 만든 뒤 마지막 1점을 내주며 14-15로 졌다. 금메달은 놓쳤지만 한국 펜싱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은메달이었다. 김영호는 “그 메달 이후 펜싱 대표팀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지원이 늘면서 세계대회에 출전할 기회도 많아졌다”며 “시드니 올림픽에 갈 때쯤에는 세계랭킹 1위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과정은 쉽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드미트리 체프첸코(러시아)를 15-14 한 점차로 이겼고, 결승에서도 랄프 비스도르프(독일)를 15-14, 한 점 차로 겨우 꺾었다.
김영호는 올림픽 메달에서만 선구자였던 게 아니다. 대표팀 코치를 그만둔 2008년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펜싱클럽의 문을 열었다. 2003년 설립된 유학 전문 컨설팅 회사 로러스엔터프라이즈 산하에 로러스 펜싱클럽을 오픈한 것. 10여년간 펜싱클럽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이 회사의 문화 스포츠 부문 부사장직만 맡고 있다. 그는 “미국 명문 대학에 입학하려면 공부와 스포츠를 다 잘하는 게 유리하다. 펜싱은 몸을 쓰는 운동인 동시에 두뇌 싸움이기도 하다. 오히려 머리 싸움이 더 중요하다”며 “경험상 공부를 잘하는 애들이 펜싱도 잘하는 것 같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상대에게 한 번 당한 기술을 두 번 당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 역시 ‘펜싱 대디’이기도 하다. 역시 펜싱 국가대표를 지낸 아내 김영아 씨 사이에 낳은 딸 김기연(24) 역시 여자 펜싱 플뢰레 선수로 뛰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펜싱을 시작한 김기연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다 2021년에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대구대에 재학 중이던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김기연은 올해 성남시청에 입단했다. 현재는 청소년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
김영호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딸에게 목표는 크게 잡자고 말한다. 만약 기연이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될 수 있다”며 “당장 올해 열리는 파리 올림픽은 쉽지 않다. 2032년 브리즈번 대회쯤에는 한 번 노려볼 만 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호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기연이도 같은 호주에서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23년간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한 그는 지금도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꼽은 건강의 원천 중 하나는 태릉선수촌의 단골 메뉴였던 불암산 훈련이다. 그는 “선수촌을 출발해 불암산 정상을 35분 안에 찍고 돌아와야 외박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네발로 기어갔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당시에 쌓은 체력이 중년이 된 지금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엔 골프와 테니스를 취미로 한다. 그는 “당시 산을 너무 많이 타서 그런지 요즘에는 등산 빼고 다른 운동을 좋아한다”며 웃었다.
일 관계상 골프를 자주 치는 편이다. 따로 레슨을 받은 적 없이 혼자 독학을 했지만 싱글을 친다. 하체가 워낙 탄탄한 덕분에 드라이버 비거리가 260m나 나갈 정도로 장타자다.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운동을 했던 다른 종목 출신 선수들과도 종종 라운드를 하는데 다들 장타자들이다 보니 화이트티가 아닌 백티를 사용한다. 하체를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테니스 역시 그에게 잘 맞는 종목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은 여전히 펜싱이다. 따로 경기 출전을 위해 훈련을 하는 건 아니지만 딸을 개인적으로 가르치면서 주 3회는 칼을 잡는다. 그는 “도복과 자켓, 장갑과 마스크를 쓰고 5분 정도만 움직이면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럴 땐 옛날 생각이 나면서 ‘준비해서 클럽 대회라도 출전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했다.
평생 칼과 함께 살아온 그에게 펜싱은 여전히 낭만 가득한 종목이다. 그는 국가대표 코치 시절 프랑스에 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오후 늦은 시간 백발의 노부부가 포도주 한 병을 들고 펜싱장에 나타나 펜싱을 즐기던 모습이었다. 그는 “프랑스에는 성인들을 위한 펜싱클럽도 적지 않다. 노부부들끼리 와서 펜싱으로 땀을 흘린 뒤 와인 한 잔 마시고, 샤워하고, 집에 가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쯤 후 완전히 은퇴한 뒤에는 나만의 펜싱클럽을 만들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펜싱의 재미와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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