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 김희진-‘선산’ 민홍남 등 국내서 주목 못받던 신인 창작자들
OTT 지원 받고 ‘글로벌 날개’ 달아
출판 IP상담 1년새 8배 넘게 급증
서울국제도서전서 판매 인기몰이
“데뷔할 줄 몰랐어요. 몇 년 동안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너무 좋았죠.”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을 연출한 김희진 감독(38)은 5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랜 고생 끝에 첫 장편영화 감독이 돼 먹먹하다는 소감을 밝힌 것이다. 김 감독은 ‘수학여행’(2010년) 등 단편영화 3편을 연출했을 뿐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다. 2017년 ‘로기완’의 연출을 제안받았지만 캐스팅과 투자 문제로 작품 제작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투자를 결정하고 배우 송중기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로기완’은 1일 공개 후 넷플릭스 비영어권 영화 부문 1위에 올랐다. 탈북자 인권 문제를 다뤄 국제적 관심을 얻은 데 따른 것이다. 김 감독은 “빛을 보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연출가로서 데뷔하는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최근 세계적인 K문화 열풍에 힘입어 국내 콘텐츠 업계에서 ‘히든 챔피언’이 부상하고 있다. 국내에선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신인 창작자들이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 넷플릭스에 따르면 2022∼2025년 선보였거나 선보일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 다섯 편 중 한 편은 신인 감독의 작품이다. 예컨대 민홍남 감독은 단편영화 ‘병원이나 가야겠습니다’(2005년)만 연출했을 뿐 주로 연출부 스태프나 조감독으로 일했는데, 올 초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선산’을 연출했다. 올 1월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황야’의 허명행 감독 역시 무술감독, 스턴트 배우로 일하다가 감독으로 처음 데뷔했다.
‘선산’이나 ‘황야’는 모두 충무로에선 메가폰을 잡지 못한 감독들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을 통해 해외로 진출 기회를 얻은 사례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19일 방한해 “신인 감독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를 무대로 데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OTT가 창작자의 명성보다 작품성에 주목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K콘텐츠 인기에 힘입어 작품만 좋다면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는 구조인 것. 배우 송중기는 ‘로기완’ 기자간담회에서 신인 감독 작품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시나리오를 보지 감독이 누군지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제 유명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작품을 보는 시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학에서도 히든 챔피언 창작자들이 빛을 보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서울국제도서전의 지식재산권(IP) 상담 건수는 2022년 115건에서 지난해 944건으로 불과 1년 새 8배 넘게 급증했다. 주연선 은행나무 출판사 대표는 “지난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해외 출판사 40곳과 상담했는데 이 중 60% 이상이 우리 책을 사려는 상담이었다”며 “해외 출판사에 서울국제도서전은 그동안 책을 팔러 오는 곳이었는데 지난해부터 사러 오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김의경 작가의 장편소설 ‘헬로 베이비’(2022년·은행나무)는 영국, 미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출간을 최근 확정했다.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미국 판권은 북미 최대 출판사인 랜덤하우스 계열의 호가스북스에 팔렸다. 호가스북스 편집자는 김 작가에게 e메일을 보내 “오늘날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문제에 관심이 높은데 ‘헬로 베이비’가 이를 잘 다뤄 마음에 들었다”고 썼다. 세계적으로 인구 감소 현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난임 병원에서 만난 30, 40대 여성의 고민을 담은 점이 호소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진희 은행나무 이사는 “인구 감소 트렌드와 소설의 주제가 맞닿아 해외에서 반응이 뜨겁다”고 했다.
신인인 박소영 작가의 장편소설 ‘스노볼’(2021년·창비)은 미국, 영국 등 10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미래 혹한기에 돔으로 둘러쳐진 따뜻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 기후 위기에 관심이 높은 해외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진보라 작가의 장편소설 ‘메모리케어’(2023년·은행나무)는 미국, 영국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딥페이크 가짜뉴스가 국내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 힘든 미래를 그린 책 내용이 영미권 독자들의 흥미를 끈 것. ‘메모리케어’를 해외에 수출한 국제 문학 에이전트 바버라 지트워는 “앞으로는 창작자의 명성보다 작품 내용의 보편성이나 작품성이 콘텐츠의 성공을 판가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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