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여러 해석을 내놓곤 한다. 특히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주인공의 감정과 주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은 더욱 그렇다. 물론 인터뷰를 찾아보면 작가와 감독의 생각을 유추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이의 입장에서 쓰인 글을 읽으면 창작자의 의도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을 펼쳤다.
“해성,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아마 이렇게 어리지 않았다면 제대로 표현했을 텐데.”
12세인 소꿉친구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이 처음 헤어지는 장면에서 해성의 감정을 묘사한 지문이다. 나영은 가족을 따라 이민을 가려는 차다. 작별을 앞두고 두 사람은 함께 걷다가 머뭇거린다. 해성은 “야!”라고 부르고 나영은 “왜!”라고 답한다. 이때 해성이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무 어려 인사마저 건네지 못하는 해성의 마음이 지문에서 짙게 느껴진다.
“너무나도 평범한 한국 가정의 너무나도 평범한 아침 식사의 모습이다. 해성이 살아오는 동안 한결같은 모습이다.”
24세가 된 해성의 집안을 묘사한 지문이다. 해성은 미국에 사는 나영에게서 연락을 받은 차다. 하지만 지문은 해성이 처한 현실을 명확히 설명한다. 셀리 송은 해성의 가족에 대해 ‘너무나도 평범한’이란 단어를 2차례 쓴다. 이민자로서 독특한 삶을 살아가는 나영 집안과 평범함을 중시하는 해성 집안이 지닌 문화 차이가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은유한다.
36세가 된 나영과 해성이 미국 뉴욕에서 만날 때 각본은 더 직설적으로 의도를 전달한다. 뉴욕에서 나영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해성의 마음에 대해 셀린 송은 “아주 길게 느껴질 게다. 고통스러울 정도로”라고 표현한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강가 풍경에 대해선 “뉴욕이란 도시만큼이나 다양한 연인들의 모습. 짝이 없는 사람이라곤 해성밖에 안 보인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의 만남을 바라보는 나영의 남편 아서(존 매가로)의 감정도 눈길이 간다. 아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해성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또 다른 생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아서가 두 사람이 서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는 걸 모른 체하자 셀린 송은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할 뿐. 친절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평가한다. 이처럼 인물들의 감정에 대해 세세히 묘사한 지문을 읽다 보면 이 작품이 영화보단 소설이나 연극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이스터에그’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다. 12세인 나영과 해성이 함께 뛰어노는 장소가 이일호 작가의 조각상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응시’라고 각본엔 명시돼 있다. 서로를 마주 보는 얼굴을 그린 조각상은 교감하는 둘의 관계를 뜻하는 것 아닐까. 나영의 부모가 이민을 위해 짐을 쌀 때 등장하는 음악은 레너드 코언의 ‘이봐, 그런 식의 작별은 안 돼’다. 두 사람의 서투른 작별에 대한 은유로 느껴진다. 해성을 만나러 간 나영을 집에서 기다리던 아서는 게임 ‘오버워치’에서 우주의 균형에 대해 설법하는 승려 로봇을 선택해 플레이한다. 아서가 불교의 윤회 개념에서 온 ‘인연’이란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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