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금지-약자 배려 명분 내세워 언어 표현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
문제되는 발언 피하려 토론 회피… 美 정치 양극화 최근 우리와 비슷
◇잘못된 단어/르네 피스터 지음·배명자 옮김/232쪽·1만7000원·문예출판사
지난해 12월 미국 하원의 교육위원회 청문회장. “유대인 제노사이드(인종학살)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징계 대상인가”라는 질문에 미국 하버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 펜실베이니아대 등 명문대 총장들이 하나같이 “맥락에 따라 다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등 동문서답을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지난해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미국 대학 내 ‘반유대교’ 집회 대응을 추궁하는 자리였다.
인종차별적 혐오 표현은 당연히 금기시돼야 한다는 점에서 쉬운 질문으로 여겨졌지만 이들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미국 보수층을 중심으로 진보 성향이 강한 미 대학 사회가 “표현의 자유 등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경도돼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퇴했다.
이 책은 성차별 혹은 인종차별 등 소수자와 약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바로잡으려는 미국의 PC가 최근 들어 극단화되고 변질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독일의 진보 성향 잡지 슈피겔의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의 갈등 상황을 다뤘는데 한국 사회와도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다.
저자는 미국에선 스스로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PC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발언을 발견하면 이를 공격하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꼬집는다. 2020년 12월 미국 일리노이대 법학과 교수인 제이슨 킬본이 학생들에게 낸 과제로 인해 대학 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직장 내 차별을 다루는 내용을 적으면서 인종차별적 단어를 피하기 위해 흑인을 비하하는 ‘니그로(Negro)’를 철자 그대로 쓰지 않고 ‘N…’으로만 썼다. 그런데 이 대학의 법학과 흑인학생회가 ‘N…’이라는 표현도 ‘정신적 테러’라며 항의했다. 결국 대학당국은 킬본 교수에게 임시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2021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육청이 민주당 상원의원 다이앤 파인스타인이 1980년대에 동성혼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이앤 파인스타인 초등학교’라는 교명을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저자는 이 같은 모습을 새로운 ‘독단주의’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PC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회 진보에 긍정적인 사람들의 열정을 꺾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이나 언론에서 논쟁적 사안을 토론하거나 보도하는 일을 피하게 돼 사실상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미국 사회에서 퍼져 나갔다는 얘기다. 그 결과 합리적인 정치문화가 실종되면서 극우 보수와 극단적 진보 세력의 양극화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을 분노의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쿨하고 여유로운 자유 개념이 이 나라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저자의 일갈은 단지 미국에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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