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벚꽃보다 일찍 피어나 봄을 알린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추운 겨울부터 꽃을 피워내는 매화를 절개의 상징으로 보고 사랑했다. 국내에는 수많은 매화나무가 있겠지만,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매화는 수령이 수백 년 된 고목(古木)에서 피어난 꽃이다. 전남 구례와 곡성의 봄꽃이 흐드러진 섬진강변으로 매화 향기를 찾아 떠났다.
● “사람도 꽃처럼 돌아온다면…”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년)에는 “사람도 꽃처럼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역)가 노년에 한글을 배워 처음 쓴 시다. 이 시를 낮게 읊조리던 주인공 찬실이(강말금 역)는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오열하고 만다.
해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꽃이 돌아온다. 죽은 듯이 보였던 나무에 새순이 돋고 꽃망울이 터진다. 계절이 가면 꽃은 시들겠지만, 또 다른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어김없이 꽃은 돌아온다. 그러나 한번 가버린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봄의 첫 꽃 소식이 전해오는 광양 매화축제나 구례 산수유축제에는 사람이 인산인해로 몰려든다. 매화는 모두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수령 200~300년 된 고목에서 피어나는 매화는 더욱 신비스럽다. 겨울에 죽음 같은 추위를 견뎌내고, 수백 년 세월 동안 봄이면 회춘(回春)해 싱싱한 꽃으로 다시 돌아온다니…. 그 변함없는 생명의 힘을 확인하고자 고매(古梅)를 찾는다.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매화나무는 전국에 4그루 있다. 전남 구례 화엄사 ‘화엄매’와 ‘들매’, 순천 선암사 ‘선암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강원 강릉 오죽헌 ‘율곡매’다. 지난주부터 일부 개화하기 시작한 천연기념물 매화들은 이번 주말 절정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매화는 빛깔에 따라 백매, 청매, 홍매로 구분한다. 매화를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촬영하면 바닷속 산호처럼 신비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지난 주말 화엄사 각황전 옆에는 가장 유명한 화엄매인 홍매가 피었다. 일반적인 분홍색이 아니라 진한 검은색 벨벳처럼 고급스러운 빛깔이라 ‘흑매’로 불리기도 한다.
높이 8.2m 화엄매가 만개하면 새벽부터 사진가와 관광객이 몰려든다. 텅 빈 화엄사 경내 마당을 빗자루로 비질하는 스님 위로 고즈넉하게 피어난 홍매를 찍기 위해서다. 화엄매는 대웅전 뒷담으로 돌아가 언덕 위에서 내려 찍어야 제맛이다. 하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몰려들다 보니 화엄사 측에서는 사진 촬영 포인트에 계단형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화엄사에서 홍매만 구경하고 가는 것은 섭섭하다. 대웅전 뒤편 울창한 대밭 숲을 지나면 구층암에 또 다른 천연기념물 ‘들매’(수령 450년 추정)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들매는 들장미, 들국화처럼 들에 핀 매화다. 매화는 중국이 원산지로 집이나 사찰에 심어 가꾸는 대부분은 꽃이 예쁜 품종을 골라 접붙여서 번식시킨다. 그러나 들매는 사람이나 동물이 매실 과육을 먹고 버린 씨앗이 싹이 터서 자란다. 들매는 꽃과 열매가 재배 매화보다 작지만 꽃향기는 오히려 더 강하다고 한다.
화엄사 들매가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었고 올 2월 각황전 홍매도 함께 화엄매로 지정됐다. 노거수(老巨樹) 탐사 전문가 임혁성 씨는 “봄에 화엄사에 수십 번 와 봤지만, 이렇게 들매에 꽃이 많이 달린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구층암에서는 요사채 처마를 받치고 있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을 감상하고, 스님이 만들어주시는 화엄사 죽로야생차(竹露野生茶)를 맛보는 것도 별미다. 대나무 밑에서 이슬을 먹으며 자란 야생 차나무 찻잎을 따서 손으로 직접 만든 녹차다. 특히 세월에 숙성시킨 발효차는 부드러운 향으로 속을 풀어주는 맛이 있다.
순천 선암사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에 담장을 따라 꽃그늘을 드리우는 20그루 매화 중 고목으로 자란 백매와 홍매 2그루는 선암매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고려 때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매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율곡매는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심어져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직접 가꾸었다고 전한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를 비롯해 많은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수령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율곡매는 2017년 냉해를 입은 후 피는 꽃 양은 크게 줄었지만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수령 350년 넘는 백양사 고불매(古佛梅)도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우화루 옆에서 자리를 지켜왔다. 내장산 국립공원에 있어 매화가 비교적 늦게 피어 이달 말까지 매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 섬진강 따라 꽃 여행
구례에서 곡성으로 이어지는 섬진강변은 매화와 산수유 천지다. 곡성군 입면 제월리 함허정(涵虛亭)에서 윤슬이 반짝이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간다. 함허(涵虛)는 ‘텅 빈 시간에 젖어 든다’는 뜻이다. 번잡했던 일상의 욕심을 버리고 내 안을 비우다 보면 뭔가 새로움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명승) 함허정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 제호정(霽湖亭) 심광형(1510~1550)이 지역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였다. 함허정 앞 매화밭을 지나면 강변을 약 20분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
제법 센 물살이 흐르는 곳에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년)에 나오는 플라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리를 건너니 하중도(河中島)인 제월섬이 나온다. 섬에는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 숲이 있고 연노랑 꽃잎이 아름다운 수선화가 활짝 웃고 있다. 제월섬을 통과하고 다리를 건너면 다시 함허정 뒷동산으로 이어진다. 대숲과 솔숲이 우거진 고즈넉한 숲길이다.
곡성의 유서 깊은 사찰 태안사 입구에도 호젓한 계곡 트레킹 길이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지어진 정자 능파각(凌波閣)에서 듣는 물소리가 청명하다. 1737년(영조 13년)에 지어진 능파각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 밑으로 내려가 올려다보는 것이 좋다.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미인(美人)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일컫는다. 계곡 바위 사이로 흘러 내려가는 폭포 위에 지어진 능파각은 허공에 떠서 물결 위를 날아다니는 듯 가벼워 보인다. 옛 선비들은 이런 계곡에 정자를 짓고 물소리, 바람 소리를 들었다. 무릇 풍류(風流)를 즐긴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봄날 집에만 있지 않고 자연 속에서 바람(風)과 물(流)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었던가.
● 서울에서 만나는 매화=서울 청계천 하동매실거리에서도 활짝 핀 매화 향기를 맡으며 산책할 수 있다. 2006년 하동군이 기증한 매실나무를 심어 만든 매화 군락지다. 지하철 2호선 용답역과 신답역 사이에 있다. 제2마장교 아래 둔치 길로 내려가면 매화길이 시작된다. 고궁에서도 봄꽃을 즐길 수 있다. 경복궁 아미산 화계, 창덕궁 낙선재 화계, 창경궁 옥천교 어구 일원이 대표적 명소다. 창덕궁에서는 전문 해설과 함께 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봄을 품은 낙선재’(3월 21일~4월 6일), 국보 동궐도 속 나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동궐도와 함께하는 창덕궁 나무답사’(4월 19일~5월 6일)가 마련된다. 덕수궁에서는 살구꽃과 함께 주요 전각 내부를 볼 수 있는 ‘전각 내부 특별 관람’(3월 28일~4월 5일)이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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