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을 다시 보게 됐다. 춘향전 무대로만 아는 건 남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남원역까지 약 2시간 20분. 알고 보니 우리나라 정원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당일치기 여행으로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사랑이 뭘까 궁금하다면 남원에서는 나만의 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빛깔의 사랑이 그곳에 있었다.
● 이상향을 향한 그리운 사랑
봄의 광한루원은 생명이다. 수양버들의 연두색 새잎들이 바람결 따라 살랑살랑. 나무에 봄기운이 오른다는 말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춘향전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광한루원의 경치를 이렇게 전한다. ‘앞 시냇가 버들은 초록색 휘장을 둘렀고, 뒤 시냇가 버들은 연두색 휘장을 둘러, 한 가지 늘어지고 또 한 가지 펑퍼져 흐늘흐늘 춤을 춘다.’
광한루원 앞 연못 ‘연지’에는 천연기념물 원앙 수십 마리가 커다란 잉어들과 함께 헤엄치고 있었다. 10년 전쯤 남원시가 잉어와 원앙을 해치던 수달의 접근을 막자 귀한 원앙 무리가 오작교 근처에 터를 잡았다. 원앙 색상이 워낙 선명해 비현실 세계에 온 느낌이다. 하긴 광한루원은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곳이지 않나.
1419년 조선의 재상 황희가 ‘광통루’라고 지은 누각 이름을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바꾼다.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떠 ‘광한루’라고 한 것이다. 이로써 광한루는 지상의 누각에서 천상의 궁전으로 격상된다. 광한루는 달나라 궁전, 연지는 은하수다. 돌다리에 네 개의 무지개 모양 구멍이 있는 오작교를 건너 광한루로 향한다. 저 끝에 그리운 견우가 서서 웃고 있을까. 은은한 달빛 아래 만나고 헤어지면 또 1년을 기다려야겠지.
광한루가 있는 정원 일대를 통칭하는 광한루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관아정원(官衙庭苑)으로 대한민국 명승(名勝)이다. 광한루에 오른다. 광한루의 진가는 내부에 들어섰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봄바람 드는 광한루에 서면 조선의 뛰어난 문인(文人) 정철이 발의한 세 개의 섬, 즉 삼신산이 시야에 펼쳐진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내부가 뻥 뚫린 본루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연지와 오작교 그리고 대나무, 배롱나무,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신선의 세계다. 광한루에 걸린 현액(懸額)이 ‘계관(桂觀)’이다.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 궁전을 암시하는 것이다.
광한루원에서는 다음 달 10∼16일 제94회 춘향제가 열린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남원 유지와 주민, 권번 기생들이 돈을 모아 춘향사당을 준공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된 춘향제는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성장했다.
광한루원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옛날이야기에 머물지 않아 빛난다. 지난해 말 문화재청이 공개한 광한루원 홍보 영상은 충격적일 정도로 참신했다. 국가대표 비보이 ‘윙’이 오작교와 광한루에서 춤을 추고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우나영 작가(활동명 흑요석)의 그림, 안숙선 명창과 남원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음악이 어우러졌다. 지금까지 12만 명이 봤다.
이것이야말로 K정원 콘텐츠가 나아갈 방향 아닐까. 이상석 문화재위원회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장도 말한다. “다음 달 17일 국가유산청이 출범하면 명승은 자연유산으로 분류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았던 우리 자연유산인 전통정원이 국가적 브랜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 아랫사람을 헤아리는 명가(名家)의 사랑
남원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민가 정원 ‘몽심재(夢心齋) 고택’도 있다.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재다. 집에 들어서니 대문채 앞에 150년 된 백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 홍매와 산수유도 봄을 알린다.
몽심재 명칭은 고려 말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충절을 다지며 보낸 시에서 유래했다.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라고 지은 시의 첫 줄 끝 자인 ‘몽(夢)’과 둘째 줄 끝 자인 ‘심(心)’을 따온 것이다. 죽산 박씨가 1700년대 초 호곡리로 집단 이주한 후 박문수의 14대손인 박동식이 이 집을 짓고 ‘몽심’을 당호로 삼았다.
몽심재를 관리하는 장덕원 교무에 따르면, 집의 터를 잡은 박동식의 부친 박원유는 풍수지리에 뛰어났다. 멀리 견두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른다. 경사진 지형을 살려 여러 채 건물이 앞뒤로 높이를 달리해 지어졌다.
이 집은 인간에 대한 배려가 가득하다. 조선 양반의 전유 공간이었던 정자를 문간채 동쪽에 짓고 하인들의 쉼터로 내주었다.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뜻의 요요정(樂樂亭)이다. 정자 앞 연못인 천운담(天雲潭)은 연두색 개구리밥이 포근히 덮었다.
놀라운 건 아랫사람들이 편히 쉬도록 사랑채에서는 보이지 않게 이 공간을 설계한 점이다. 안채 여성들의 휴식을 위해 부엌 쪽 지붕도 길게 뺐다. 연달아 대과 합격자를 배출한 만석꾼 박씨 집안은 기근이 들면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도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장덕원 교무는 숨은 가드너 고수였다. 몽심재에는 무려 48종의 꽃이 보존돼 있다. 이제 곧 금영화, 꽃잔디, 아마꽃이 핀다. 5월에는 사랑채 앞에 가득 피는 달맞이꽃이 장관이란다. 그 꽃구경을 하러 또 가야겠다.
● 자신을 들여다보는 내면의 사랑
남원시 이백면에는 ‘아담원’이라는 수목원이 있다. 배경 지식 없이 찾아갔다가 입구에서부터 깜짝 놀랐다. 나무들이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리 통창을 통해 너른 정원을 바라보는 카페에는 책과 꽃이 가득했다. 더 올라가면 미술관이다. 프랑스 니키 드 생팔과 미국 로버트 모어랜드의 작품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아담원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산’이라는 뜻이다.
알고 보니 ‘고려조경’이 나무를 가꾸던 조경농원이 2018년 정원으로 재탄생한 곳이었다. 고려조경은 LF네트웍스의 전신으로, 아담원은 구본걸 LF 회장 등 오너 일가가 지분을 소유한 LF 특수관계사였다. 현재는 LF의 자회사인 엘앤씨가 운영하는데, 워낙 숲이 울창해 ‘아담숲’으로도 불린다. 고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이 조성했던 경기 광주시 ‘화담숲’이 절로 떠오른다.
● 지역 명소를 만든 화가의 고향 사랑
2018년 문을 연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숲으로 둘러싸인 전원형 미술관이다. 남원 출신 김병종 화백이 자신의 작품 400여 점을 고향에 기증해 남원시가 운영하고 있다. 젊은층 중심으로 연간 관람객이 8만 명에 이른다.
경관부터 위로의 힘이 있다. 흰색 미술관 건물 앞에 찰랑대는 계단형 수경(水鏡)이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면서 새소리를 듣고, 봄기운 가득한 연초록 산수를 노란 송홧가루로 뒤덮은 김 화백의 그림을 보면 살아가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는 평생 생명을 주제로 작업해 ‘생명 작가’로 불린다.
지금 열리고 있는 ‘일상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전부’ 전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주제로 김 화백과 지역 작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져 인상적이었다. 지역의 어린이들이 찾아와 자연과 문화예술을 함께 누리는 모습도 희망적이었다. 생명과 일상의 소중함을 남원에서 되새겨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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