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세상이 정한 규격에 미달인 내가 미울 때가 있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그런 관객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 누구도 자기 존재를 의심하며 살면 안 된다”고 따뜻하게 다그친다. 우리는 못 된 존재가 아니라, 단지 복잡하고 다채로운 존재일 뿐이란 이유에서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이 아시아 초연됐다. ‘디어…’는 2017년 제71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다.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외톨이 소년 에반 핸슨이 어두운 삶에서 벗어나고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말을 저지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에반 역은 배우 김성규, 박강현, 임규형이, 홀로 에반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들의 ‘정상화’를 바라는 엄마 하이디 역은 김선영, 신영숙이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총 15곡의 넘버는 주인공의 감정선과 맥락을 섬세하게 반영한 덕에 이야기 서사를 빈틈없이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라라랜드’ ‘위대한 쇼맨’ 등을 작사·작곡한 벤지 파섹과 저스틴 폴이 곡 작업에 참여했다. 특유의 세련되고 서정적인 팝 스타일을 살려 간판 넘버 ‘You will be found’ 등 누구나 즐기기 좋은 음악을 들려준다. 별도 앙상블이 없지만 4명의 등장인물이 부르는 ‘Good for you’는 탄탄한 화음 덕에 1200여 석 규모의 대극장을 화려하게 메웠다.
2021년 개봉한 동명 영화와 비교해 서사 공감도가 높다. 관객 저마다 판관이 되어 주인공을 비난하기 쉬운 줄거리지만, 상황의 불가피함과 에반의 극단적 심경을 암시하는 대사를 곳곳에 배치해 자연스레 유예를 이끌어냈다. 에반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장면은 보다 주체적, 점층적으로 구성해 성장의 국면을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공연에 출연한 임규형은 갈 곳 잃은 시선과 가쁜 호흡, 허공을 헤매는 손짓 등을 통해 ‘배달원과 대면 결제조차 힘겨운’ 심리 상태를 관객에게 매끄럽게 전달했다.
50cm 정사각형 발광다이오드(LED) 패널 935장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 역시 볼거리다. 물리적 세트 대신 패널을 활용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세상과 에반의 침실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는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어 에반 핸슨’이 오늘날 우리 주변의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식상한 러브 라인도, 신파성 슬픔도 남발하지 않는다. 그 자리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명료한 대사들이 채운다. 엄마 하이디가 에반을 다독이며 “언젠간 이 모든 일들이 아주 작게 느껴질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은 길고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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