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발’이란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도 스타 하형주(62)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이뤘다. 22살의 나이에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25살의 이른 나이에 대학교수가 됐다. 모교 동아대에서 4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난해부터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감사로 일하고 있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그의 꿈은 육사에 진학해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운동 선수의 길로 접어들면서 포기해야 했던 꿈은 아들과 딸이 직업군인이 돼 대신 이뤘다. 특히 딸 하늘 씨는 육사를 졸업한 뒤 ‘한미연합사단’에서 만난 미 육군 장교 마일스 가브리엘슨 씨와 결혼했다. 역대 1호 한미 현역 장교 커플이었다.
하지만 그가 꼽은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올림픽 금메달도, 대학교수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 큰 누나에게서 신발 선물을 받았을 때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경남 진주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그는 유독 발이 컸다. 현재 310mm짜리 신발을 신는 그는 대아중에 다닐 때부터 ‘왕발’로 유명했다. 당시 학생들은 실내에서 학생화를 신어야 했는데 문제는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 학교를 맨발로 다녔다. 운동화도 접어서 신어야 했기에 친구들과 공을 찰 때도 맨발로 찼다. 선도부도 그만은 예외로 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국제시장을 다녀온 10살 위 큰 누나가 미군들이 신던 세무 운동화를 사 왔다. 하형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봤다. 얼마나 좋았던지 한동안 밥 먹을 때도 운동화를 안고 먹고, 잘 때도 안고 잤다”며 “큰 누나는 내게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운동을 할 때도 메달에 대한 욕심보다는 올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심어주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중학생 때까지 그는 발은 컸지만 빼빼 마른 체형이었다고 한다. 몸이 커지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말 씨름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진주상고에 진학해 씨름을 본격적으로 익히면서 실력이 부쩍 늘었다. 진주는 예전부터 씨름으로 유명했는데 고 최욱진 장사(1960~2011년)가 그의 진주상고 동기였다. 그는 “동기들에 비해 늦게 씨름을 시작했지만 몇 개월 만에 다 이기게 됐다. 단 한 명 욱진이만 꺾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욱진이는 정말 뛰어난 장사였다”고 회상했다.
몇 달 뒤 그는 부산체고로 전학해 유도로 전향한다. “이왕 운동을 할 거라면 올림픽 종목을 해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씨름 기술을 결합한 유도로 그는 단숨에 유도계의 강자로 올라섰다. 2학년 때부터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하더니 3학년 때는 그를 상대할 선수가 없었다. 만약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지 않았다면 그는 1984년이 아닌 1980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국체전 레슬링 종목에 출전한 적도 있다. 당시 부산체고는 유도부와 레슬링부가 같이 운동을 했는데 레슬링 고중량 종목에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덩치가 큰 그가 대신 출전하게 된 것이다. 간단한 규칙을 익히고 출전한 전국체전 레슬링에서 그는 그레코로만과 자유형 두 종목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큰 덩치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는 동아대에 다닐 때에도 있다. 함께 연습할 파트너를 찾기 힘들었던 그는 학교 뒤편 구덕산에 있는 편백나무를 연습 파트너로 삼았다. 하루 1000번 이상 편백나무를 상대로 밭다리 후리기 기술을 연마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 총장실로 항의 전화가 걸려 왔더란다. 인근 사찰의 스님이 “덩치가 산만한 어떤 학생이 나무를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 총장은 스님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하형주를 불러서는 오히려 용돈을 줬다. 그는 나중에 태릉선수촌에 들어와서도 나무에 대고 밭다리 후리기 연습을 이어갔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그가 금메달을 딴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모두 잘 어우러진 결과다. 특히 운동을 시작할 때 배웠던 씨름 기술이 결정적이었다. LA 올림픽에서 가장 큰 고비는 8강에서 만난 당시 세계 랭킹 1위 미하라 마사토(일본)과의 대결이었다. 하형주는 씨름에서 익힌 들어메치기 기술을 응용해 미하라를 매트 위에 내리 꽂았다. ‘한판’이 명백했지만 심판진은 ‘절반’을 선언했다. 그러자 하형주는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다시 한 번 들어메치기를 성공시켰다. 또 다시 절반 판정을 받았지만 승리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금의환향한 그를 향한 유혹은 엄청났다. LA 올림픽 선수단 기수를 맡았을 정도로 대표팀의 얼굴이었던 그가 금메달까지 땄으니 그를 데려가려는 실업팀도 많았고, 광고를 찍자는 회사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대학원 진학이었다. 그는 “동아대에 입학한 순간부터 막연히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유혹이 있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금메달리스트인 그가 1984년 대학원 조교로 들어가서 받은 첫 월급 명세서엔 13만 5000원이 찍혀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끝에 그는 25살의 어린 나이에 ‘교수님’이 됐다.
교수의 꿈은 이뤘지만 그에게 여전히 배움이 고팠다. 막상 강단에 섰지만 학생들에게 가르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유도라면 자신 있었지만 이론이나 다른 종목을 가르치기엔 역량이 부족했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월급을 받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1990년대에 성균관대 박사과정에 입학해 스포츠심리학을 다시 배웠다. 부산 동아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서울 성균관대에 와서서 학생으로 공부를 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3년 반 만에 박사 학위를 딴 그는 “당시 3시간을 가르치려면 사흘 밤낮을 준비해야 했다”며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히 하다 보니 이제는 3시간 수업 정도는 가볍게 할 정도가 됐다”며 웃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한국 체육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는 “국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언젠가는 한국 체육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며 “선수 시절 경험을 살려 진천선수촌장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기회가 닿아 국민체육진흥공단 감사로 일하게 됐다. 그는 “온 국민이 체육을 즐기면서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며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태어난 조직인 만큼 서울 올림픽 정신에 부합되는 정책들을 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부산에 살 때 그는 가벼운 등산으로 건강을 지켰다. 부산에는 구덕산을 비롯해 금정산 등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산들이 많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 편백나무와 씨름을 하던 구덕산 바로 아래 집이 있었다”며 “틈만 나면 산을 올랐다. 친구들도 주변에 많이 있어서 함께 산을 올랐다가 하산한 뒤 막걸리도 한 잔씩 마시곤 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직장이 있는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덕분에 수시로 올림픽공원 이곳저곳을 걷고 또 걷는다. 점심 식사 후 20~30분 산책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혼자 걷기도 한다. 그는 “올림픽공원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보기 힘든 훌륭한 공원”이라며 “이곳에 스토리텔링을 입히고 흥미로운 국제 대회까지 개최한다면 더 세계적인 명품 공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