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았다는 건 지켜준 이가 있었다는 의미
성가시고 귀찮은 것은 버리고 마는 어른의 세상,
꿋꿋이 나무를 지켜내는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부재함으로써 드러나는 존재가 있다. 일주일 전 출근길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에 오를 때였다. 분주하게 버스 계단에 올라타려는 내 발아래 무언가 탁, 하고 걸렸다. 고개를 숙여 발밑을 내려다보니 몸통이 잘려 나간 나무 밑동이 보였다. 일주일이 또 흐른 어제(15일) 아침에는 나무 밑동의 흔적마저 사라진 채였다. 여기 언제 나무가 있었냐는 듯 새 보도블록이 나무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도 집 근처 지하철 앞 정류장에 있던 나무가 같은 방식으로 잘려 나갔었다. 어떤 이유로 나무들이 잘려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나무 곁엔 지켜줄 누군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남 창원시 북부리 동부마을에 살아 있는 수령 약 500세의 노거수(老巨樹) ‘창원 북부리 팽나무’가 대표적이다. 2022년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와 ‘우영우 팽나무’로도 유명한 이 나무 곁엔 ‘당산나무 할아버지’ 윤종한 씨(62)가 있다. 문화재청은 2022년 3월부터 전국 천연기념물 가운데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 179그루를 꼽아 이를 지킬 수호자를 임명해오고 있는데, 윤 씨가 그중 하나다.
수고비 한 푼 받지 못하는 명예직인데도 그해 12월 내가 만난 윤 씨는 나무를 제 자식처럼 돌봤다. 드라마 유명세로 몰려든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모아 버리는 일도 그의 몫. 하루에 50L짜리로 여덟 포대 쓰레기를 치우는 날도 있었지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식에게 물려줄 논도 땅도 없다. 시골 사는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는 이유였다.
물론 윤 씨 혼자서 해낸 일만은 아니다. 그의 답변 속 ‘우리’는 온마을을 아우른다. 마을회관에 꽂혀 있는 사진첩엔 나무와 함께 한 마을 사람들의 역사가 빼곡했다. 여름철 나무 그늘에서 수박을 먹고 축제를 벌였던 흑백사진 속 아이들이 이젠 마을의 어른이 되었다. 마을회관에 앉아계시던 한 어르신은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내게 수십 년 전 이 나무 덕에 목숨을 구한 사연을 꺼냈다. 억수 같이 비가 와 물난리가 났을 때, 나무가 뿌리 내린 언덕에 올라간 덕에 물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얘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지켰듯, 나무도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와 마을 사이를 잇는 끈끈한 유대 속엔 나무 한 그루도 우리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지난달부터 전국 최초로 시범 운영 중인 제주도의 ‘반려 가로수 입양제도’는 바로 이런 믿음을 이어 나가려는 시도다. 봄·여름철만 되면 제주도 가로수 관리 부서엔 “가로수를 베어 달라”는 민원이 쏟아진다고 한다. 우거진 나뭇가지가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가 상당수라고. 이 제도를 기획·운영하고 있는 제주도 산림녹지과 관계자는 15일 전화 통화에서 “‘가로수를 제거해 달라’는 민원과 도시 녹화 사업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지자체 혼자 힘만으론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역민들과 함께 나무를 지켜보자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입양 대상은 도내 6개 구간, 총 2660m 길이 거리에 심어진 가로수 4360본이다. 운영 첫해인 올해엔 총 6개 구간을 지킬 6개 팀을 모집한다. 신청서를 낸 기관이나 단체가 최종 입양자로 결정되면 이들이 나서서 가로수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물을 주고, 화단을 가꿔나가는 식이다.
나 혼자 먹고살기도 빠듯한 마당에 누가 이런 번거로운 일을 신청할까 싶지만, 곳곳에서 신청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마감(22일)이 일주일 남은 가운데 벌써 2개 기관에서 신청서를 냈는데, 그중 한 곳이 도내 어린이집이다. 신청서에는 다음과 같은 사유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연과 교감을 쌓을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아이들이 나무와 함께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성가시고 귀찮은 것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꿋꿋이 가로수를 지켜내는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봄여름엔 가로수 때문에 거리에 벌레가 좀 꼬일 것이고, 가을 무렵엔 낙엽 탓에 거리가 지저분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나무들 덕분에 도심 속 갈 곳 잃은 새들은 둥지를 틀 것이고, 한여름 땡볕을 거닐던 사람들은 선선한 그늘을 얻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나무들을 가꾸고 지켜낸 경험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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