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은어, 속어죠.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찐 우정’ 친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마음 든든하고 위로를 받는다. 연락을 자주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않는다. 챙겨주고 아니고를 계산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져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서로를 피한다. 연락하는 것조차 그에게 피해를 주는 일로 여겨져서다. 차원이 다른 배려다.
인생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 잘 산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살면서 친하다는 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곁에 있어주는 그가 소중하다. 가장 바라는 일이 그의 인생이 술술 풀려나가는 거다.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조금 도와주고 끌어주면 금상첨화다.
배우 조상구(70)와 장세진(60)의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어디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둘은 서로를 가족이라고 소개한다.
두 사람은 2002~2003년 전 국민이 열광했던 인기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의 ‘히어로’였다. 조연이었지만 주연들을 살리면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견인했기에 주역이나 다름없었다. 조상구는 전국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살린 명품 연기로 화제가 됐다. 찰진 이북 사투리와 비장한 격투 연기가 압권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순간 시청률이 치솟기 일쑤였다. 요즘도 그의 시라소니 연기 장면은 짤(인터넷에서 도는 사진, 짧은 영상, 그림 등을 이르는 말)로 SNS 등에서 회자된다. 영상물에 달린 댓글 대부분은 칭찬이다. 시라소니 역할에 한해서는 대체 불가한 배우라는 것이다. 조상구 역시 자신의 인생 캐릭터로 꼽는다.
조상구는 그의 예명이고, 본명은 최재현이다. 그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이현세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이장호 감독이 만든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이하 외인구단ּ1986년 작)을 통해서다. 이현세 작가의 고향 친구라는 인연이 영화출연으로 이어졌다. 외인구단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이 조상구다. 그리고 이후 그의 예명이 됐다.
장세진은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던 영화학도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연기를 하기 시작한 뒤 액션 영화에 종종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야인시대〉로 드라마에 데뷔했다. 당초 그에게 맡겨진 역할은 하야시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연기에 자신이 없었던 데다 일본인 역할이라 감독님에게 정중하게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맡게된 배역이 김두한의 오른팔이자 친구인 문영철이었다. 중저음 목소리에 190cm 가까이 되는 큰 키, 괜히 눈 마주치면 바로 고개 숙일 수 밖에 없는 인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 잡았다. 기대 이상으로 맡은 역할을 소화하자 그의 출연시간은 당초 계획된 분량을 훨씬 넘어 계속됐다.
이달 11일 약속장소에 나타난 장세진은 드라마와 달리 얼굴에 살이 붙은 모습이었다. 미리 도착했던 조상구는 그를 보자마자 “나는 ‘문영철’ 얼굴이 너무 멋있었다. 지금 얼굴은 별로야”라고 타박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실제 온라인 정보 공유 사이트 검색란에 ‘장세진’을 입력하면 그를 두고 리암 니슨, 리처드 기어를 닮았다는 댓글이 적잖다. 실물을 보면 꽤 닮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 어떻게 문영철을 하게 됐나요.
“하야시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고 며칠 후에 조감독에게 전화가 왔어요. 감독님께서 할 말이 있다고요. 다른 배역을 맡을 것이라고는 생각 안하고 편하게 만났어요. 그런데 문영철을 제안하더라고요. 6회 정도 나온다고 해서 ‘제가 연기를 모르니 잘 알려주셨으면 한다. 감사하다’고 받았죠. 참 연기 편하게 했어요. 고인이 되신 장형일 감독님에게는 ‘연기 못한다고 뭐라고 하시면 안 된다’고 농담도 하면서 찍었어요.”(장세진)
“장 감독이 작은 아버지나 다름없었잖아.”(조상구)
“실제 감독님이 제 작은 아버지하고도 동갑이셨어요. 의견을 다 들어주셨죠. 농담으로 극중에서 여자친구도 없이 버틴다고 했더니, 나중에는 진짜 (조)여정이를 여자친구로 만들어주셨어요. 주인공인 (김)두한이 여자만 있으면 됐지, 극중에서 문영철의 여자가 왜 필요했겠어요. 하하. 첫 촬영 때는 카메라 쳐다보지 말고 대사만 외워 하라셨어요. 대본 리딩도 안 시키셨어요. ‘그래도 연기를 배워야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하던 대로 해요’라고 물리치세요. 그래도 편집이 기가 막히게 잘 되어서 나갔죠.”(장세진) “세진이는 적응을 잘하는데 저는 그러질 못했어요. 감독님이 말하면 저는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였어요. 그런데 세진이는 감독님한테 ‘아버지, 아버지’ 라고 해요. 너무 부러웠어요.”(조상구)
“형님, 제가 왜 그랬는지 아세요? 뭔가 바라는 게 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저 감독님에게 고마운 마음만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죠.”(장세진)
- 원래 계획 분량과는 달리 청년 시절의 김두한(안재모 분)에서 해방 이후 장년의 김두한(김영철 분)으로 넘어가는 2부에도 등장을 했잖아요.
“바라는 게 없었으니 감독님이 또 기회를 주신 거죠. 문영철이 2부까지 나올 이유가 없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1부에 등장했던 김두한 친구들이 전부 빠지면 모양새가 안 좋다. 알아서 멋있게 정리해줄테니 더 하자’고 그러시더라고요.”(장세진)
〈야인시대〉는 후반부로 접어들기 직전 조상구와 장세진은 촬영장에서 만났다. 사실 두 사람은 훨씬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중간 공백이 길었다. 둘의 우정에는 ‘시즌 1’과 ‘시즌 2’가 있다. 둘이 〈야인시대〉를 통해 다시 재회를 했는데, 조상구가 예전 장세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 40년 전 만났다가 20년 전 또 만난 ‘우리’
- 어떻게 된 사연인가요.
“1985년인가, 제가 한양대 (연극영화학 전공) 다닐 때였죠. 학교 정문 앞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었어요. 형님도 거기에서 운동을 하셨어요. 그러다 만난거죠. 그때엔 형이 배우인지 몰랐어요. 제가 체육관 관장님하고 친했고, 형님도 잘 아셔서 자연스럽게 형이라고 부르게 됐죠. 제가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하고 말을 섞지 않을 때였어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어요. 형은 그 때도 느낌이 남달랐어요. 멋있었고, 제가 좋아했죠. 말도 많이 하고요.”(장세진) “나는 세진이 얘가 깡패인줄 알았어요. 하하.”(조상구)
이후 장세진이 배우로 데뷔하면서 연락은 끊겼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두 사람은 〈야인시대〉에서 만났다. 하지만 당시 조상구는 장세진을 기억하지 못했다. - 정말 모르셨어요?
“시라소니로 캐스팅이 되고 촬영장에서 세진이를 만났는데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인사를 먼저 해야 겠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들더라고. 인상이… 보통이 아니잖아요. 하하. 평소 저는 나이가 적어 보이는 사람에게 ‘아이고,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하거든요. 세진이한테는 공손하게 두 손 모으고 ‘안녕하세요’라고 했어요. 하하. 그랬더니 세진이가 ‘제가 형님 밑입니다. 말씀 낮추세요’라고 해요.”(조상구)
“저는 형이 캐스팅 된 걸 알고 있었어요. 형이 나를 못 알아봐서 서운하다는 생각은 안 했고요.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형의 느낌이 그대로 있었어요.”(장세진)
“정말 무서웠어요. 하하. 고마운 건 김두한 패거리들 중에 세진이가 가장 먼저 와서 인사해줬다는 거예요. 〈야인시대〉에 나오기 전까지 8년을 놀았습니다. 그런 저를 알아봐주니 얼마나 고마웠겠어요. 처음 보는 사람으로 인식했지만 세진이는 역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어요. ‘포스’가 달랐어요. 그래서 더 빨리 친해지지 않았나 싶어요.”(조상구)
“대학 때 봤던 형의 느낌과 기운을 형이 그대로 갖고 나타나주니까 반가웠죠. 내친 김에 두한이 패거리 배우들을 전부 형한테 소개시켜줬죠.”(장세진)
“항상 세진이가 촬영장에서 이 관계, 저 관계 정리를 다해줬어요.”(조상구)
● 연락처 5번째로 저장한 ‘조상구’
그리고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한 번 붙은 인연은 이후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을 계속 정리하다보니 저의 휴대폰 연락처에는 전화번호가 12개 밖에 없어요. 저장한 순서가 있습니다. 제 아내, 부모님, 그리고 형이 있고요, 그리고 5번째 이름, 보이죠? 상구 형 번호입니다.”(장세진)
“와! 정말? 감동인데. 세진이는, 저도 처음 얘기하는데, 동생이 아니라 평생 친구죠.”(조상구)
“형을 5번째에 올려놨다는 것, 그만큼 저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겁니다.”(장세진)
“감동의 연속이네. 저는 개인적으로 힘들 때 세진이한테 전화를 안 했어요. 세진이가 ‘형, 왜 연락 안했냐’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도 있죠. 저는 굳이 그런 얘기 할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동생인데 내가 힘들다는 것을 알려주면 듣는 본인도 힘들지 않겠어요?”(조상구)
매사 정리가 확실한 장세진을 조상구는 있는 그대로 믿어준다. 동생의 결정과 판단을 존중하고 무조건 따라간다. 장세진은 이에 대해 “내 옆에 이런 형님이 있다는 자체가 복”이라고 했다.
- 오늘 보니 형이 신중하게 동생 배려를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예를 들어 어디 같이 갈 곳이 있으면 형한테 ‘몇 시쯤 나오세요’라고만 해요. 그런데 형이 못 가고, 안 간다는 얘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반대로 형은 저에게 꼭 의견을 물어봅니다. 저는 안 물어보죠. 그래도 형이 언짢아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형은 늘 저에게 ‘괜찮냐, 가능하겠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농담으로라도 반항할 기회를 안 줘요. 하하.”(장세진)
- 이런 형이 다 있을까 싶습니다.
“100% 신뢰감을 받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짠합니다. 곱고 고운 형님의 마음들이 저한테 쌓여 많이 묻어 나와요. 감동입니다.”(장세진) 조상구는 오른쪽 눈 시력이 좋지 않다. 망막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수정체가 터져 대규모 안과 수술도 두 차례나 받았다. 아직도 완치된 것은 아니어서 수술을 한 번 더 받아야 한다. 후유증으로 오른쪽 얼굴을 움직이는 게 불편하다.
그는 독서광이었다. 연기를 안 할때면 책을 끼고 살다시피했다. 알려진 대로 영화 번역 일도 오래 했다. 국내 개봉 명작들이 그의 섬세한 번역을 거쳤다. 책과 번역 일에 집중하다보니 눈을 혹사하게 됐고,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그는 장세진에게 알리지 않았다. 걱정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수술한다 정도만 알고 있었죠. 얘기를 듣고 얼굴은 편한 적 했지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정말 상구 형은 신사입니다. 형이 그동안 살면서 고통이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늘 수양하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겸손합니다. 남한테도 의지하는 일도 없이 사세요. 그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참 괜찮은 사람을 내가 좋아하고 있구나’하는 뿌듯함이 커요.”(장세진)
● 100% ‘조상구’ 연기가 보고 싶다
둘은 연기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웃고 신이 난다. 연기는 곧 둘의 삶, 인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연기에 대해서 공감하는 교집합이 많다. 그래서 만나면 집요하게 연기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떠든다.
-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와 문영철이 격투를 벌였다면 어떤 장면이 나왔을까요. 예전 운동도 같이 했던 사이였으니 예상 못한 캐릭터가 나왔을 수도 있겠어요.
“상대도 안 되죠. 붙었다면 드라마 그 회가 저에게는 마지막 회가 됐겠죠. 문영철이 무조건 한 방에 죽는 상황입니다.”(장세진)
“모르지. 감독님이 너를 아꼈으니까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었다고 봐.”(조상구)
- 형의 연기는 어떻습니까.
“일단 저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말해두고요. 상구 형은 ‘색깔’을 갖고 있어요. 그 색깔을 전부 가져다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을 형이 아직 못 만났다고 봐요. 사람들이 아는 형의 색깔은 〈외인구단〉의 조상구, 〈야인시대〉의 시라소니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형이 역할에 맞춘 거라고 봐요. ‘인간 조상구’, ‘사람 최재현’을 온전히 담는 작품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럴려면 꼭 주인공을 맡아야 해요.”(장세진)
그는 주인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조연은 ‘서포터’입니다. 배우 리암 니슨만 해도, 리암 니슨 자체가 곧 〈테이큰〉 입니다. 형은 주인공으로 충분히 자신을 연기할 준비가 돼 있어요.”
- 형이 주연을 해야 했을 작품이 있었다는 얘기로도 들립니다.
“먼저 (최)재성이는 제 친한 동생이라는 것을 말해 둡니다. 참 바르고 사람 좋고 흠 잡을 데 없는 친구예요. 그 동생을 폄하하는 게 아니고요. 〈외인구단〉에서 ‘까치’ 배역은 최재성이 아니라 조상구가 맡았어야 했어요. 형이 조상구 역할을 분명 잘 했습니다. 그런데 까치 캐릭터는 상구 형이었어요. 상구 형이 까치를 맡았다면….”(장세진)
“쫄딱 망했을 거다. 하하.”(조상구)
“망했을 수도 있겠죠. 재성이가 당시 워낙 스타였으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안 망하고 ‘외인구단 = 최재현’의 신드롬이 생겼을 수도 있을 거예요.”(장세진)
조상구는 장세진의 말에 고개를 한참 끄덕이다 한 마디 덧붙였다.
“연기에 대해서 겸손하고 싶은데, 시라소니도 저하고 잘 맞아 떨어졌던 겁니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도 안 했어요. 감독님이 저한테 전적으로 맡기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연기했어요. 처음에는 이북 사투리를 흉내내기 바빴지만 나중에는 연구를 해서 연기를 했죠.” - 조상구의 시각에서 조상구는 어떤 배우일까요.
“색깔은 개성이죠. 주인공을 맡기면 잘하겠지만, 우리는 ‘쌈마이’ 배우예요. 요즘에는 ‘별 볼일 없는 3류 배우’라는 의미의 은어로 쓰입니다만, 원래 ‘쌈마이’ 배우는 얼굴이 잘 생기지 않은 배우를 의미해요.”(조상구)
“ 저기 형님, ‘우리’라는 표현은 빼주세요. 하하.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하세요.”(장세진)
“외국에서도 유명 배우가 아니더라도 메소드 연기(배우가 극중에서 자기에 완전 몰입해 하는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많아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세요. 형사로 나오든, 할아버지로 나오든, 서부극에 나오든 그 사람은 그냥 클린트 이스트우드잖아요. 역할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배우가 아니라는 거예요. 한 마디로 자기를 연기하는 배우라는 겁니다. 로버트 테일러, 타이론 파워 등도 자기 생긴대로 연기한 배우였어요. 미키 루크도 그래요. 매력 있는 얼굴 그대로 작품에 나왔잖아요. 특별하게 연기를 잘 한 건 없는데 자기를 연기했어요. 미키 루크 역할 중에 기억나는 것 있나요? 〈나인 하프 위크〉에서도 미키 루크가 맡은 배역 이름이 기억 안 나잖아요? 마찬가지에요. 항상 저는 저를 연기하고 싶거든요. 내 것을 100%로 펼쳐서 주어진 역할을 만들어가는 겁니다.”(조상구)
- 〈야인시대〉의 시라소니는 조상구다?
“남들은 시라소니라고 하지만 저예요.”(조상구)
- 동생(정세진)은 주인공을 해야 나를 연기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조연급입니다. 얼굴 자체가 주연급이 안 돼요.”(조상구)
“형은 그래요. 하하.”(장세진)
“진짜 저는 임성민(1995년 작고)하고 연기하면서 주연의 꿈을 안 꿨어요. 버렸죠.”(조상구) “형님,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따져서 배우를 나누면 요즘 ‘노땅’ 취급 받아요. 하하. 잘 생긴 배우가 있으면 ‘멋있는’ 배우도 있다 정도로 해야죠. 멋있다는 표현이 맘에 안 들면 ‘죽이는’ 배우 같은 표현도 쓸 수 있잖아요. 연기자에 대한 최고의 평가요? ‘멋진 배우’라고 생각해요.”(장세진)
“그런가. 정말 아까 네가 차에서 점퍼를 걸치면서 내리는데, 속으로 ‘이 자식은 항상 멋있네’라는 생각이 들었어. 장세진의 아우라가 확실히 나오더라고. 가공하지 않은 자기만의 매력, 저는 이것이 멋있는 배우의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우리가 때를 못 만난 것 같아. 하하.”(조상구)
●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동생과의 만남이 인생작일 수도…”
장세진이 보기에 조상구는 하고 싶은 연기에 대한 확실한 철학이 있다. 그렇지만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 형을 정세진은 자극하고 싶다. 그래야 본인도 연기 갈증이 생길 것만 같아서다.
“저는 배우를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잖아요. 처음 연기할 때도 감독이 대사 안 시킬테니까 ‘미안한데 그냥 서 있기만 해라’고 했어요. 쉽게 연기를 했고 노력을 안 했죠. 그래서 작품이 안 들어와도 미련이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상구 형을 보면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내가 나와도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볼 수 있는 작품도 만들고 싶습니다. 요즘 채널은 많잖아요. 물론 형이 등장하셔야죠. 지금까지 작품은 ‘조상구’ ,‘최재현’을 보기 위한 밑밥이었다고 봅니다.”(장세진)
- 인생작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떠합니까.
“저는 ‘문영철’ 의 연장 선상에서 연기를 하겠죠. 연기를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100% 제 모습으로 역할을 채울 준비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기에서 삶의 진솔한 면이 약간은 묻어나겠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세월도 겪고요. 그런데 형님은 완전히 다를 겁니다.”(장세진)
“저한테는 얘 밖에 없어요. 예전에도 다른 사람들이 세진이 연기에 대해서 어쩌고 저쩌고 해도 나는 세진이만 보면 정말 ‘죽인다’, ‘멋있다’라는 생각 밖에 안 들어요. 세진이는 세진이를 연기할 겁니다. 얘가 뭘해도 저는 그렇게 여길 거예요. 세진아, 우리 괜찮은 캐릭터야. 빠지지 않아. 나보고 안타깝다고 했잖아. 그런데 너도 연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을거야. 인생작을 만나야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조상구)
- 연기 의지만 봐도 두 분이 서로에게 더 집중할 것 같습니다.
“각자 현실을 살아가면서 힘든 부분이 있겠죠.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관계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0.000….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에게서 ‘최재현’이 더 묻어 나왔으면 해요. 그래서 솔직히 상구 형 외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장세진)
● 함께 찾을 ‘우리’의 새로운 존재감
동생의 계속되는 칭송에 조상구는 “살아가는데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 둘이 함께 채우고 살자”며 손을 잡았다.
조상구는 장세진이 자신의 연기에 대해 자신감을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문영철’ 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전한 선한 영향력과 희망까지 너무 깎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 때 장세진은 자신의 연기를 남에게 내세우기 주저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사람들이 ‘문영철’로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는 것에 적응이 힘들었다. 그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조상구가 보기엔 지나친 겸손이다.
- 정말 그런가요?
“저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팬들이 사인을 해달라면 해드리고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미치겠고, ‘오버’하는 것 같아 싫더라고요. 사인 요청 받으면 ‘진짜 배우가 되면 해줄게요’라며 사양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알아봐주시고 거기에 호응을 해드리는 것이 삶의 활력, 원동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답답해졌어요. 정직하지 못했으니까요. 연기를 아예 안하고 다른 길로 갔으면 이런 기분이 절대 안 들었겠죠. 연기를 못하는데도 배우가 된 것이 팩트지만 그게 다른 한 편으로는 ‘핑계’였어요. 배우가 되고 수많은 기회가 왔는데 노력을 안해서 못 살렸잖아요. 미친듯이 연기를 잘하려고 했다면 지금 덜 부끄러웠을텐데 말이죠. 이런 저와 형을 비교해보니 안타까움이 더 큰 거죠.”(장세진)
“이제 우리의 영향력을 활용해서 도전을 해보자고. 나는 이용할 자신이 있어. 그렇게 생각해야 해.”(조상구)
문영철을 보고 환호했던 사람들도 많고, 통쾌해 했을 시청자도 많았으니 장세진이 다른 연기로 더 사랑받을 수 있고, 더 주목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장세진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실제 본인이 체감하는 것보다 문영철의 캐릭터와 그 역할을 소화한 장세진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문영철’로 인생의 활력과 원동력을 얻었다며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그래서 예전에 더 잘할 걸, 더 보여줄 걸, 더 노력할 걸 그랬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적잖다.
- 문영철 이름을 누군가 반갑게 불러주던 순간에는 자신의 연기 인생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겠죠?
“아는 친한 동생의 아버님이 위암 수술을 받으신다고 해서, 수술 전날 인사드리러 집에 갔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방에서 나오시면서 저를 보더니 ‘문영철, 야! 문영철’ 이러시면서 제 손을 잡고 좋아하시는데 제가 오히려 감동을 받았어요. 제 연기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이 아예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내가 위로를 해드리려고 갔다가 위로를 받았어요. 그 동생이 아버지가 80세가 넘으시도록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답니다. 동생한테 그랬죠. ‘내가 아버님께 고맙다’라고요. 정말 큰 보상을 받은 것만 같았습니다.”(장세진)
“내가 갔으면 더 좋아하시지 않았겠나. 하하.”(조상구)
“당연하죠. 시라소니하고는 상대가 안 되니까.”(장세진)
두 사람은 이제 평생 가지고 갈 대강의 인생 방향을 정했다. 여기에 연기 갈증만 해소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시라소니와 문영철이라는 캐릭터의 인지도를 활용하면서 그간 채우지 못한 연기 갈증을 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장세진이 “그동안 너무 갈증나게 살아왔다. 연기를 제대로 하고 싶어 목이 마른데 콜라만 많이 마신거다. 순간은 시원하지만 금방 갈증이 또 생긴다. 지금은 물을 많이 마셔야할 때”라고 하자 조상구는 “표현이 기가 막히다. 그래서 내가 장세진을 좋아해”라고 맞장구를 쳤다.
- 연기에 대한 목마름은 역시 형이 조금 더 커 보인다.
“제가 배우는 배우인가 봐요. 일본 배우 키타노 타케시가 한 쪽 얼굴이 마비된 연기를 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정지 장면에서 저런 표정이 나올까 감탄했었죠. 그런데 제가 요즘 키타노 타케시의 표정이 나오는 거예요. 눈 수술한 오른쪽 얼굴은 안 움직이고 반대 쪽 얼굴은 웃을수 있어요. 한 쪽에서 미소가 돌 수 있잖아요. 한 쪽은 싸늘한데 다른 쪽은 환한 느낌이 살아 나오는 거죠. 거울을 보다보니 그런 제 얼굴이 딱 키타노 타케시가 되어 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작품을 찍으면 이 얼굴을 써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님이 저를 아프게 해놓고 마지막으로 연기에 써 먹으라고 주신 것 같아요. 하하.”(조상구)
“형. 눈이 회복돼야 일도 하는 거지, 무슨 말씀이세요.”(장세진)
“세진아. 내가 얼마나 긍정적이냐.하하.”(조상구)
일반인들이 쉽게 말 걸기 어려워하는 동생과 주변사람들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 형이 운명같이 만나 서로를 오랜시간 관통하고 있다. 동생은 형을 웃으며 품고 온갖 세상 얘기를 해댄다. 그러다 혼도 내고 심하면 꾸짖기도 한다. 그런 동생 때문에 형도 웃고 말을 한다. 친구 같아져버린 동생이 무엇을 하자면 무조건 따르는데 이날 만큼은 용기를 내 먼저 제안해본다. 연기 말고 같이 하고 싶은 게 또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세진아, 우리 매일 아침 들기름 한 숟갈씩 먹어보자. 건강에 좋대.”
“아 눈물 나네, 날아다니던 시라소니 형님이 이제 건강 챙기실 때가 됐나. 하기야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찾던데, 그래요. 먹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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