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61)이 제작·각본·연출 전 과정을 지휘한 미국 HBO 드라마 ‘동조자(The Sympathizer)’에서 방점을 둔 부분이다. 원작 장편소설 ‘동조자’(2018년·민음사)이 베트남 전쟁(1960∼1975)의 비극을 담은 데 중점을 뒀다면 박 감독은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에게 1인 4역을 맡기면서 이런 역할을 극대화했다. 인종차별적이거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동양학 교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하원 의원, 영화감독을 한 배우에게 맡겨 할리우드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이다.
특히 드라마 2화의 제목은 ‘모범적인 아시아인’이다. 2화에서 동양학 교수(로다주)는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혼혈인 ‘나’(호아 숀데이)에게 스스로 동양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각각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라고 지시한다. ‘나’는 동양엔 서양에 없는 다원적 사고가 있다고 말하지만, 동양학 교수는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또 동양학 교수는 일본계 미국인 비서인 소피아 모리(샌드라 오)에게 일본 기모노를 제대로 입으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일본인에게 ‘우나지’(목덜미·うなじ)는 인체에서 제일 선정적인 부위”라며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모리의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모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 번도 기모노를 입은 적이 없지만,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라는 것이다.
박 감독이 할리우드를 풍자한 건 한 아시아 국가 출신 배우가 모든 아시아인 역할을 맡는 할리우드 세태 때문이다. 박 감독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로다주의 역할들은 정치, 안보, 교육, 문화에서 성공한 백인 남성들”이라며 “미국이라는 사회를 보여주는 네 얼굴이자 결국 하나의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원작 소설 작가 역시 ‘모범적인 아시아인’으로 살아왔다. 원작을 쓴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53)은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만 4세이던 1975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보트피플’이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영문학과 민족학을 전공했고, 현재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문학과 교수이자 작가로 활동한다.
응우옌은 29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할리우드는 영화와 텔레비전이 세계가 미국을 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한 세기 동안 증명해 왔다”며 “미국 대중문화의 세계적인 영향력 때문에 아시아와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할리우드로 방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응우옌은 또 “내 소설이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사용되는 걸 행운으로 생각한다”며 “‘동조자’가 더 많은 베트남, 아시아 이야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지렛대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 베트남전 참상 고발한 소설, 색채 가득한 드라마로
공산당 모독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출판되지 못했고, 2016년 미국 퓰리처상을 수상한 원작 소설은 스파이의 이야기다. 원작에서 ‘나’는 베트남전을 겪는 스파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독백으로 표현한다. 또 원작은 베트남의 어두운 면모를 강조한다. “그들(남베트남인)은 내 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우였다”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도시는 막 함락되려는 참이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도시는 곧 해방될 터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종말이었지만 내게는 단지 세상의 변화일 따름이었습니다.”
반면 드라마는 ‘나’의 혼란을 외부의 시선에서 응시한다. 또 박 감독은 베트남을 연상하게 하는 빨강, 노랑 색채를 자주 사용한다. 색채를 중시하는 박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다. 패전을 앞둔 사이공 주민들이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마음을 달래고, 고문 장면 곳곳 유머를 심어둬 블랙 코미디를 살렸다.
드라마는 서술 방식은 변화무쌍하다. 예를 들어 드라마 첫 부분에 주인공 ‘나’가 CIA 요원인 클로드(로다주)와 극장 앞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상영 중인 영화의 제목을 ‘엠마뉴엘’이라고 했다가 ‘죽음의 갈망’이라고 정정한다. 북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에 갇힌 나의 진술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진정성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겪는 이중성을 더욱 복잡하게 보여준다.
응우옌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소설은 전적으로 ‘나’의 고유한 관점 안에서 이야기된다. 복합적인 인물로서 ‘나’의 상황이 서사에 자연스레 스며든다”며 “인물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바라보는 드라마 각색에서 원작 소설의 스타일을 완전히 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응우옌은 또 “박 감독은 서사, 편집, 구성, 색, 소리, 연기를 사용해 시청자의 인식을 형성하고 시청자에게 콘텐츠뿐만 아니라 시청자가 보고 있는 ‘형식’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한다”며 “나도 문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동일한 작업을 시도한다. 그래서 내 소설과 논픽션은 종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본질에 대해 성찰한다”고 했다.
● “식민 지배, 동족 전쟁…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하다”
“이런 일은 다낭과 나트랑에서 이미 벌어져, 미국인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방치된 주민들은 멋대로 서로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런 사례가 있었음에도 사이공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고, 대다수 시민들은 아무도 간통의 진상을 밝히지 않는 한 서로 끈덕지게 매달린 채로 물에 빠져 죽기조차 마다하지 않으면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원작 소설 ‘동조자’에서 주인공 ‘나’는 1975년 미군이 베트남 철수를 앞두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미군이 남베트남 곳곳에서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군은 철수를 공식화하진 않은 만큼 남베트남 지도부가 있는 사이공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를 담았다.
나는 북베트남이 남쪽에 심은 고정간첩이다. 한편으론 미국으로 유학한 적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CIA에게 발탁돼 남베트남 장교로 위장한 스파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성은 소설의 첫 문장에서 강렬히 드러난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응우옌은 2008, 2010년 두 차례 한국에 방문했다. 베트남전쟁을 다루는 한국의 시각을 알고 싶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가고,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1988년·창비)도 읽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동족 간 전쟁을 겪은 가슴 아픈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하다”고 했다.
“외부 개입과 내부 정치적 투쟁에 의해 흔들렸다는 점에서 두 나라 모두 비슷합니다. 이 과정을 반성하는 방법으로 문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나 문학과 같은 문화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죠.”
응우옌과 박 감독이 서로에게 영감을 받은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응우옌은 지난해 6월 기자간담회에서 ““복수는 나의 것’(2002년), ‘올드보이’(2004년), ‘친절한 금자씨’(2005년) 등 ‘복수 3부작’을 다 봤을 정도로 박 감독의 열렬한 팬”이라며 “기억 복수 폭력 등 박 감독이 다뤄 왔던 주제가 ‘동조자’에도 가득하다”고 했다.
박 감독은 18일 기자간담회에서 “원작 소설 ‘동조자’를 처음 읽었을 때 불꽃놀이를 보는 듯했다. 표현과 문체가 아주 컬러풀하고 소란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1화에서 주인공이 남베트남을 탈출하려 할 때 활주로가 폭격과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이 그런 느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동조자’는 박 감독의 작품세계를 확장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베트남전이란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보단 해외에서 더 주목받고 있다”며 “미국 자본으로 베트남전 이야기를 베트남인의 시선에서 다뤘다는 점에서 박 감독의 새로운 실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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