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장이가 되겠다는 11살 아들,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BreakFirst]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6일 07시 30분


직접 만든 호미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이평화 씨.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고,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고3 그리고 수능, 대학 입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아이가 당연하게 밟는 경로입니다. 의무교육을 포함한 이런 과정은 모든 이에게 두루 맞도록 설계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겐 맞지 않을 수도 있죠. 가령 대장장이가 꿈인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학교에서 수학의 정석을 펼쳐 놓고 앉아 있는 시간만큼, 대장간에서 망치질과 담금질 배우는 시간도 충분히 필요할 겁니다.

대장간을 학교 다니듯 ‘통학’해온 용감한 청년이 있습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대장장이 이평화 씨입니다. 전북 진안군 선암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처음 대장장이란 직업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고는 “대장장이가 되겠다”며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가 아닌 대장간으로 향했습니다.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다닐 때 이평화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충청남도 부여의 ‘보은대장간’에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집에서 통학하기엔 먼 거리였죠. 시외버스로 왕복 10시간이 넘게 걸렸거든요. 대장간 근처에 자취방을 구해 혼자 살았습니다. 당시 그는 15살이었습니다.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멋있네. 잘 선택했다’ 하셨어요
기술을 배우기 위해 타지에 혼자 살겠다는 결정은 본인 스스로 내린 건가요?
“대장간이 제겐 학교나 다름없었어요. 학교는 매일 가야 하는 곳이고, 집에서 머니까 기숙사 생활하듯 자취하게 됐어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부모님께서 자취방도 구해주셨고요.”

어린 나이에 그런 결정을 내린 평화 씨도 대단하지만 아들의 결정을 믿고 지지해준 부모님도 범상치 않으신데요.
“11살에 처음 부모님께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주셨어요. ‘멋있네, 좋은 직업 같다. 평화 너는 만드는 걸 좋아하니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년 정도 지나니까 아버지께서 ‘대장장이가 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직접 지인을 통해서 대장간을 알아봐 주셨어요.”

보통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으니 대학부터 가라’고 하는 부모님이 많을 것 같은데요.
“제 부모님은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공부에 흥미가 있고 잘하는 게 아닌 이상 무작정 학교만 갈 필요는 없다. 기술을 배울 거면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공부해서 대학에 간다고 했어도 지지해주셨을 거예요.”

‘관성을 깨는 교육관’을 가지신 분들이네요.
“저도 가끔 이 사람들(부모님)이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웃음)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이것저것 여러 직업을 가졌던 분이에요. 책도 엄청나게 읽으시고요. 붕어빵 장사, 벌목, 목수… 여러 일을 하면서 갖게 된 교육관이 있으세요. 아버지는 ‘너 알아서 해라’ ‘간섭하지 않겠다’ 하시고 뒤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거든요.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게 해주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게 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의 교육관이 저한테 딱 들어맞았고요. 운이 좋은 편이죠.”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다면 부모님 같은 교육관을 본받고 싶으신가요?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피앙세와 대화를 많이 나눠야겠죠?(웃음) 피앙세도 동의한다면 저 역시 부모님이 제게 해주셨던 대로 하고 싶어요. 전 부모님을 존경하거든요.”

부모님(이규홍, 이은경)은 평화 씨 세 남매를 홈스쿨링으로 길러냈다. 이평화 씨 제공


나를 믿는다는 건 자부심, 약간의 오만함, 그리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낙관입니다.
‘남들만큼 하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남들과 다르게 사는 건 중간도 못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규격에서 벗어난 삶’을 실천에 옮기려면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익숙한 관성을 깬다는 건 안정을 버리고, 미지의 불안을 끌어안는 일이니까요. 20년 남짓이지만 그가 살아온 길도 그랬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 궁금합니다.
“쇠를 다루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쇠의 물성을 터득한다고 할까요? 쇠마다 특징이 다르거든요. 탄소 함량에 따라 강한 쇠가 있으면 무른 쇠가 있고요. 달군 상태에서 물에 넣었을 때 깨지는 쇠가 있고 휘는 쇠가 있어요. 쇠는 그 성질에 따라 다루는 기술이 다 다르고… 정말 신기하고 재밌어요.”

평화 씨가 직접 만든 호미를 달구는 과정. 이평화 씨 제공
평화 씨가 직접 만든 호미를 달구는 과정. 이평화 씨 제공
‘이렇게 살다가 망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종종 하는 생각이에요.(웃음) ‘뭐 먹고 살지?’ 이런 생각을 하긴 하는데…. 결국 ‘어떻게든 먹고 살지 않을까’로 귀결되더라고요. 부모님도 저와 제 선택을 지지해주시고요. 그리고 저는 저를 믿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깊게 빠지진 않아요.”

나를 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나는 뭘 해도 되겠지’라는 약간의 오만함, ‘뭘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입니다. 15살 때 대장간 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의 확신은 없었어요. 근데 몇 년 지나면서 실력이 쌓였고 이젠 이 정도 기술이면 뭘 하든 먹고 살 순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죠. 그렇다고 해서 전 아직 대장장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에요. 스승님들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법니까?
“지금은 수입이 있다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에요. 전문적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도 아니고 기초부터 배우는 단계거든요. 아, 얼마 전 제가 ‘유퀴즈’에 출연했는데요, 그 방송 보시고 연락해 와서 이런저런 물건 만들어줄 수 있냐고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칼이나 호미, 망치 같은 것들요. 용돈벌이 수준이에요.”

평화 씨가 직접 제작한 문화재수리기능인 철물 기초과정 졸업작품. 이평화 씨 제공

스무 살 대장장이의 하루는 단조롭습니다. 해가 중천으로 향해갈 오전 11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오후가 되면 마당으로 향합니다. 마당엔 닭장을 개조해 만든 그의 작업장이 있거든요. 화덕에 불을 피우고 쇠를 녹이고 망치로 열심히 두들깁니다. 그러다 보면 뭉툭한 쇳덩어리에서 이런저런 모양이 모습을 드러내죠. 보통은 오후 7시에 ‘칼퇴’하지만 작업이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저녁 9시, 10시까지 머무릅니다.

―이제 막 대학 신입생이 된 또래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일상이네요.
“다를 거 없어요. 친구들이 학교 가는 대신 저는 대장간에서 공부하는 거예요.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쉬는 날을 제가 정할 수 있어요. 쉬고 싶으면 그냥 쉬거든요.(웃음) 방학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여행 가고 싶으면 여행도 하러 가고요. 주말엔 친구 만나러 시내도 가요.”

―초등학교 졸업 후 홈스쿨링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들었어요. 친구들이 학교 이야기하면 소외감을 느끼진 않나요?
“사실 친구가 별로 없긴 해요.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그런 걸 수 있지만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시골이라 애초에 또래가 많지 않아요. 가끔 친구들이 학교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요.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라 그런지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친구들 덕분에 ‘학교가 이런 곳이구나’ 알게 되는 게 많아요.”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어릴 때부터 학교 다니는 걸 싫어했거든요.(웃음)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후회한 적은 거의 한 번도 없었어요. 대장간 일을 배우는 게 너무 재밌거든요. 하고 싶은 일에만 완전히 집중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내가 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요.”

재작년 전통문화교육원에서 문화재수리기능인 철물 대장간 심화과정 수업을 듣는 모습. 이평화 씨 제공
재작년 전통문화교육원에서 문화재수리기능인 철물 대장간 심화과정 수업을 듣는 모습. 이평화 씨 제공


쇠는 여자친구 같아요. 너무 좋다가도 권태로울 때도 있고. 지루할 틈이 없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지금 그의 마음에는 온통 ‘쇠질’ 뿐입니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대장간에 출근해, 쇠를 녹이고 모양을 내고 망치질하는 일에 빠져 있습니다. “쇠가 여자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할 정도로요.

쇠가 여자친구 같다니 표현이 재밌네요. 어떤 의미인가요?
“평소엔 작업하는 게 너무 좋은데 (작업 과정이) 틀어지면 완전 하기 싫어질 때가 있어요. 너무 좋다가도 권태가 찾아올 때도 있고, 저를 정말 화나게 할 때도 있고요. 제가 이 일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작업의 상태에 따라 제 감정을 쥐락펴락해요.”

대장장이의 일이란,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잖아요. 지겨울 땐 없나요?
“밖에서 보면 반복적인 작업 같아 보여도 망치칠마다 정말 달라요. 망치질 할 때 쇠가 어떻게 변하는지 계속 느낄 수 있거든요. 망치를 잘못 때려서 실수하면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다른 곳을 때려야 하고, 이런 걸 계속 생각하면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모양이 완성돼있어요. 질감과 색깔, 온도도 다 달라요. 쇠의 물성이 달라지는 과정이거든요. 지루할 틈이 없어요.”

평화 씨가 만든 작품. 이평화 씨 제공
평화 씨가 만든 작품. 이평화 씨 제공


제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평화는 자신의 SNS와 유튜브 채널에 자신을 ‘제품보단 작품을 만들고 싶은 대장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술자, 장인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대장장이 이평화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유동렬 야장전수자에게 대장간 기술을 사사했습니다. 지난해 문화재수리기능 양성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나요?
“기술을 배워서 제품만 만들면 기술자가 돼요. 하지만 저는 생각과 가치관을 담아낸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기술자라기보단 예술가로 사는 게 꿈이에요. 그러려면 지금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책도 많이 읽어야겠고요. 근데 기술이 없인 작품을 만들 수 없잖아요. 머릿속으로 만들고 싶은 것들을 만들려면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기술 배우는 데에 집중하고 싶어요. ‘좋은 대장장이’가 먼저 되어야죠.”

―‘좋은 대장장이’는 어떤 사람인가요?
“일단 제가 ‘좋은 대장장이’라고 아직은! 말씀 못 드립니다. 제 스승님들이야말로 좋은 대장장이예요. 그분들 이야기를 해보자면, 일단 일에 대한 자부심이 커야 하고요. 일을 무척 사랑해야 해요. 실패했을 때 바로 주저앉지 말고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하고요.”

―어린 나이에 적성과 꿈을 찾았다고 부러워할 것 같아요.
“저는 되게 운이 좋았어요. 만약 유튜브에서 대장장이란 직업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냥 학교에 다녔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농사짓는 농부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잘 맞는 직업을 어린 나이에 찾았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계셨고,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네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대신 대장간으로 ‘통학’한 20살 대장장이 이평화 씨.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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