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마음속에 잠든 그리움, 향수를 자극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3일 03시 00분


일민미술관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展
국내외 작가 12팀 80여점 전시… ‘그리움’ 주제로 동시대 작품 모아
“아이돌의 옛 대중문화 리바이벌 등… 그리움은 현재 지배하는 유력 감정”

그리움을 주제로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모은 일민미술관 기획전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가 6월 23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서는 스티브 비숍의 ‘스탠더드 발라드’. 등 예술가 12팀의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리움을 주제로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모은 일민미술관 기획전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가 6월 23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서는 스티브 비숍의 ‘스탠더드 발라드’. 등 예술가 12팀의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폐막식을 담은 영상. 이 영상에선 올림픽 마스코트인 곰 ‘미샤’가 색색 풍선에 매달려 허공으로 떠오른다. 공산권 첫 올림픽이었던 모스크바 올림픽은 냉전 갈등으로 60여 개국이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됐다. 때문에 영상 속 폐막식은 세계 평화와 화합이 돼야 할 축제가 쓸쓸하게 막을 내리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영상의 배경 음악은 미국 가수 노라 존스의 ‘선라이즈’(2004년)다. 해당 영상의 작가는 “오래된 헤어진 연인을 기리기 위해 이 곡을 썼다”고 설명한다. 러시아에서는 구소련 시대에 대한 향수인 ‘소비에트 노스탤지어’를 상징하는 곰돌이 ‘미샤’가 작가에겐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바뀌는 현장. 지난달 12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개막한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서 볼 수 있는 캐나다 출신 작가 스티브 비숍의 작품 ‘스탠더드 발라드’의 내용이다.

일민미술관의 전시 ‘포에버리즘’은 비숍의 영상 작품처럼 ‘그리움’을 주제로 동시대 미술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기획의 글에서 윤율리 일민미술관 학예팀장은 “소셜미디어에서는 과거의 ‘하이라이트’를 모아 클릭 수를 높이고, 아이돌 그룹은 옛 대중문화를 끊임없이 리바이벌 한다”며 “그리움이 현재를 지배하는 유력한 감정이자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업 전술이 되었다”고 밝힌다.

그리움을 주제로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모은 일민미술관 기획전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가 6월 23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서는 전다화의 ‘나 같은 여자’(위쪽 사진), 이유성의 ‘피어스’(아래쪽 사진의 왼쪽), ‘약사여래입상’(아래쪽 사진의 
오른쪽) 등 예술가 12팀의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리움을 주제로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모은 일민미술관 기획전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가 6월 23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서는 전다화의 ‘나 같은 여자’(위쪽 사진), 이유성의 ‘피어스’(아래쪽 사진의 왼쪽), ‘약사여래입상’(아래쪽 사진의 오른쪽) 등 예술가 12팀의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런 맥락에서 전시는 박민하, 송세진, 윤영빈, 이유성, 정연두, 정 말러 등 국내외 작가 12팀의 작품 80여 점을 소개한다. 전시장 1층에서 비숍의 영상 다음으로 볼 수 있는 전다화의 대형 캔버스 작품 ‘나 같은 여자’(2024년)는 화장실 바닥에 지푸라기가 가득하고, 황새가 어리둥절한 듯 서 있는 풍경을 묘사한다. 작품의 원본은 2016년 미국 남부를 허리케인 매슈가 강타했을 때, 공중화장실로 숨어든 아프리카대머리황새를 촬영한 사진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 넣고 ‘나 같은 여자’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작가는 재난 현장 사진 속 황새를 자신의 일상 속 감정에 대한 은유로 바꾼다.

또 전시장 2층에서 볼 수 있는 이유성의 조각 ‘약사여래입상’은 작가 자신과 가까운 지인들의 몸을 석고로 뜬 다음 표면에 동료가 그린 드로잉을 덧붙였다. 역시 ‘약사여래입상’이라는 이미지가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 온 역사적인 의미는 제거한 채 껍데기만 가져와 차용한 형태다.

일련의 작품을 통해 전시는 현대 사회가 느끼는 ‘노스탤지어’에 실체가 있는 것인지를 되묻는다. 비숍이 그리움의 상징으로 내세운 ‘미샤’와 전다화가 감정 이입한 ‘아프리카대머리황새’가 작품과 현실에서 전혀 다른 맥락의 의미를 가진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현실보다 더 친밀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리워하는 현상을 문화비평가 그래프턴 태너는 ‘영원주의’라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의 포에버리즘, ‘영원주의’는 여기서 차용했다.

2023년 태너가 출간한 단행본 ‘포에버리즘’은 6월 중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일민미술관은 이 책을 토대로 같은 달 번역가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교육 프로그램 ‘역자후기30’을 개최한다. ‘포에버리즘’을 번역한 작가 김괜저가 참여한다. 5월에는 참여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아티스트 토크’도 열린다. 6월 23일까지.

#일민미술관#포에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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