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에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들이 초록의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눈이 시원해지니 허파까지 상쾌해진다. 얼마 전까지 노란색 황매화와 분홍색 진달래가 기세를 뽐냈다면 오월의 꽃은 흰색이 대세다. 은근한 자태가 보고 있어도 그리운 가침박달, 청순한 병아리꽃나무, 흰양귀비…. 큰줄흰나비는 순백의 민백미꽃이나 미나리냉이 위에 내려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번 주말 가족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을 추천하고 싶다. 오월의 신록이 아름다운 곳, 우리나라의 대표적 희귀 야생난초인 광릉요강꽃이 지금 만개한 곳, 지나온 날들을 나무들이 말해주는 곳, 그래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 바로 국립수목원이다. ● 희귀한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봉선사천(川)을 가로지르는 수목원교(橋)를 건넌다. 초록색 하트 잎을 품은 계수나무가 반긴다. 수목원 여행의 시작이다. 가만 보니 대형 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든 관람객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이 꽃을 피운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1990년대 박신양 최진실 주연 영화 ‘편지’를 봤던 독자라면 기억할 것이다. 수목원 연구사인 남자 주인공이 여자 친구를 새벽에 전화로 깨워 수목원으로 데려간 장면을. 남자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 귀한 꽃이 피어났다고, 그 꽃을 자신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여자가 꽃 이름을 묻자 남자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개불알꽃요.” 당시 영화 주요 촬영지가 국립수목원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관람객들은 이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찾아온다.
개불알꽃은 가운데가 길게 늘어지는 꽃잎 모양을 보고 민간에서 익살스럽게 불렀던 이름이다. 하지만 국가수목유전자원목록위원회는 입에 올리기 민망했던 이 꽃의 이름 대신 ‘복주머니란’을 선택해 2007년 펴낸 국가표준식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고로 개불알꽃은 이제 복주머니란으로 불러야 한다.
복주머니란속(屬) 식물은 세계적으로 멸종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에는 복주머니란, 털복주머니란, 광릉요강꽃 등 이렇게 3개 종(種)이 자생한다. 특히 광릉요강꽃은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로 국내에서도 경기, 강원, 전북 등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 광릉숲 죽엽산 자락에서 처음 발견됐다. 입술 모양 꽃잎이 요강처럼 생겼다고 해서 광릉요강꽃으로 불린다. 서양 이름은 ‘Korean lady’s slipper’(한국 숙녀의 슬리퍼). 무분별하게 채취돼 자생지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이 희귀식물을 국립수목원이 2021년 세계 최초로 기내(시험관이나 배양기 안) 종자 발아에 성공했다. 대량 증식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많은 이들이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개불알꽃)이 같은 꽃인 줄로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복주머니란은 분홍빛을 띠고 통통한 형태인 데 비해 광릉요강꽃은 중앙의 붉은 부분을 미색 꽃잎이 갸름하게 감싼다. 특히 광릉요강꽃은 잎이 360도 퍼지는 여성의 풀(full) 스커트 형태라 ‘치마난초’로도 불린다. 치마를 확 펼쳐 춤 추는 무용수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 느낌이 물씬 난다.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 부근 나무 장벽 구역에서는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을, 약용식물원 가는 방면 복주머니란속 전시원에서는 교잡종인 ‘얼치기복주머니란’을 볼 수 있다. 빛이 들 때마다 카메라 셔터들이 찰칵찰칵. 이번 주말을 넘기지 않고 방문하면 좋겠다. 지금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 수목원에서 생각하는 과거와 미래
국립수목원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가가 운영하는 수목원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984년 조성공사를 시작해 1987년 문을 열었다. 조선 세조 능(陵)인 광릉의 부속림이어서 500년 넘게 잘 관리된 땅에 전국 임업시험장에서 가져온 나무들을 심었다. 수목원 명칭은 처음 광릉수목원에서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바뀌었다. 개원 당시 수목원 입구에 세웠던 ‘광릉수목원’ 표석은 수목원 산림박물관 앞으로 옮겨졌다.
전시 공간이 102ha 규모인 국립수목원에는 7개 테마 숲길이 총연장 20km에 걸쳐 조성돼 있다. 숲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숲생태관찰로(길이 460m)를 걸은 뒤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육림호를 바라보는 코스가 가장 사랑받는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물멍’(물을 멍하니 바라보기)을 하면 감각은 열리고 마음은 내려놓게 된다. 어른 팔 만한 물고기들도 보인다. 40여 년 전 경기 청평 내수면연구소에서 기르던 물고기 5000여 마리를 옮겨왔는데 그중 잉어와 비단잉어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물, 나무, 산, 숲이 어우러지는 육림호는 국립수목원 대표 명소다. 특히 봄에는 물가에 핀 연분홍 철쭉이 청순한 경관을 이룬다. 그런데 산철쭉과 철쭉도 사람들이 자주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예다. 흔히 철쭉으로 불리는 진분홍 꽃 이름은 산철쭉이고, 물철쭉으로 잘못 불리는 연분홍 꽃 이름은 철쭉(연달래)이다. 사랑은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이젠 철쭉을 철쭉으로 불러야 한다.
국립수목원은 역대 대통령 기념 식수들이 자리 잡고 있어 ‘국가대표’ 수목원의 차별점을 보여준다. 대대로 심은 전나무 숲길도 유명하다. 국토 녹화와 임업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헌정한 ‘숲의 명예전당’도 들러 보면 좋겠다. 세계적 육종학자 고 현신규 박사, 임업에 열정을 지녔던 고 최종현 SK 창업회장을 비롯해 8명이 헌정돼 있다.
개원 25주년을 맞은 국립수목원은 어린이날을 맞아 ‘알숲놀숲’이라는 산림 새싹 키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알파 친구들아, 숲에서 놀자, 놀면서 숲을 즐기자’라는 뜻으로 식물학자와 정원사 같이 수목원을 둘러싼 다양한 직업군을 아이들이 체험하도록 준비했다. 미래 세대가 디지털 기기를 잠시 내려놓고 숲과 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 국립수목원 속 나만의 시크릿가든
국립수목원은 25개 전문 전시원에 식물 4854종(19만9212본)이 심어져 있다. 광릉요강꽃 같은 희귀식물 23종, 장수하늘소를 비롯한 천연기념물 20종이 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에서). 드넓은 국립수목원에서는 누구든 ‘나만의 식물’ ‘나만의 시크릿가든’을 삼을 수 있다. 누군가는 봄을 일찍 알리는 풍년화에, 누군가는 바람에 쓰러지고도 새잎을 돋아내는 휴게 광장의 121세 오리나무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누군가는 키 작은 나무언덕에 올라 헝클어진 마음을 정돈할 것이다.
기자는 우리 자생식물의 검박한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그래서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이 나만의 시크릿가든이다. 보존원 울릉도본원에는 만병초가 피어 있다. ‘만 가지 병을 치유하는 풀’이라고 했던가. 정자(퍼걸러)에 올라 울릉도 희귀특산식물 두메부추와 섬시호 등을 바라본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했던 풀 . 오월 국립수목원은 삶의 의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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