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 : 숲 사진을 찍을 것인가, 나무 사진을 찍을 것인가 [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4일 13시 00분


변영욱의 백년사진 No. 59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사진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원형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사진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하나씩 선별하여 소개하는데, 독자들의 상상력이 더해짐으로써 사진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 심판이 포함된 유도 경기 사진 vs 심판이 안 보이는 유도 경기 사진

오늘 소개할 사진은 유도 경기의 순간을 포착한 두 장의 사진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1924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렸으며, 유도 경기 중인 두 청년의 모습이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도대회 광경                                                                                                                              / 1924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
◇유도대회 광경 / 1924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

심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 사진은, 관중들의 흐릿한 윤곽만 보여주며 경기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같은 대회를 촬영한 또 다른 신문 사진이 있습니다. 1924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강무관에서 주최한 유도대회                                                                                                         / 1924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
◇강무관에서 주최한 유도대회 / 1924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 사진 역시 포커스 아웃(focus out)된 관중은, 주제인 유도 경기 모습에 시선이 집중될 수 있게 돕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심판의 모습을 포함함으로써, 경기의 규칙과 진행 과정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이 사진은 당시 유도가 대중에게 소개되던 초기 단계임을 생각하면, 심판의 포함 유무가 사진의 설명적 가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 등장인물 2백 명의 사진 vs 등장인물 20명의 사진


같은 날짜에 각각 다른 신문에 실린 또 다른 사진들을 살펴보면, 어린이날 행사를 기념하는 두 사진이 있습니다. 동아일보에는 수백 명의 어린이가 찍힌 전경 스타일의 사진이 게재되어, 행사의 대규모를 강조합니다. 192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2면 사진입니다.

◇어린이날 축하회                                                                                                                       /192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어린이날 축하회 /192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한편 조선일보는 어린이들이 고무풍선을 날리는 순간을 포착한, 더 간결한 사진을 실었습니다. 1924년 5월 3일 조선일보 3면 사진입니다.

◇어린이들의 고무풍선 날리는 광경                                                                                       /1924년 5월 3일자 조선일보
◇어린이들의 고무풍선 날리는 광경 /1924년 5월 3일자 조선일보

앞의 유도 경기 사진에서는 동아일보가 상대적으로 간결했었는데 어린이날 행사 사진에서는 조선일보 사진이 훨씬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진 선택은 그 시대와 사회의 편집 기준을 반영합니다. 대규모의 행사를 보여주는 전경 스타일의 사진은 이벤트의 규모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클로즈업이나 작은 그룹을 중심으로 한 사진은 개별적인 순간이나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습니다.

●포함시킬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

사진기자들과 편집기자들이 항상 고민하는 결정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진을 프레이밍하면서 어디까지 넣을 것이고 어디부턴 제외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사진은 뺄셈’이라는 교과서적인 잣대로 보자면 미니멀리즘이 고급스런 사진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신문에는 가끔, 아니 잊을만하면 전경(全景) 스타일의 사진이 게재됩니다. 등장인물이 많은 사진(1924년 5월 3일 자 동아일보 어린이날 축하회)을 전경 스타일의 사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행사의 규모 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편집기자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풍선 날리기 순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조선일보 편집자의 선택도 존중합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신문 사진에는 등장인물이 많습니다. 위의 사진들을 보면 100년 전에는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미국 뉴욕타임스와 조선일보 지면을 비교했던 김영수 박사(전 부산일보 사진기자. 현재 미국에서 저널리즘 교수로 활동 중)의 책 『기록자와 해설자: 조선일보와 뉴욕타임스의 사진 비교』에서 실증되기도 했습니다. 김 교수는 신문 사진을 등장인물 숫자에 따라, 군중 사진(15명 이상 포함), 미디엄 사진(5∼14명), 희소 사진(4명 이하)로 구분하면서 군중 사진은 전체 규모를 강조하는 사진이고, 희소 사진은 개별적인 사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형식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문화적 산물이자 문화적 배경과 연관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을 중시하는 미국 신문에서는 등장인물이 적은 희소 사진이 많이 선택되고, 전체 맥락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등장인물이 많은 군중 사진이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 결과를 책에서 밝혔습니다.

● 숲을 보여줄 것인가 나무를 보여줄 것인가

전체 맥락을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신문의 게이트키퍼인 편집기자들이 등장인물이 많은 사진만 선택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전경 스타일의 사진을 골랐다가 다음 날에는 클로즈업 스타일의 사진을 고르기도 합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지면과 뉴스 형식의 변화를 꾀하는 겁니다. 현장을 뛰는 사진기자 입장에서 다양한 앵글의 사진을 취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숲을 보여줄 것인가, 나무를 보여줄 것인가를 현장에서도 계속 판단을 해야 하는 겁니다.

아주 효율적인 사진 취재를 하는 동료 기자가 저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현장에 가면 군대 사격장에서 훈련하듯이 사진을 찍는다는 겁니다.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으로.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잘 이해를 하실텐데요. 멀리 있는 타깃(멀), 가까이 있는 타깃(가), 가운데 있는 타깃(중)이 순서대로 올라오고 그 타깃이 올라오는 순서에 따라 몸의 자세를 바꿔가면서 사격을 하는 훈련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전경 스타일(멀), 클로즈업 스타일(가), 중간 스타일(중)을 섞어가면서 취재를 하면 다양한 앵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더라는 노하우였습니다. 꼭 신문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더라도 응용해 볼 만할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학예 발표회나 부모님의 팔순 잔치에서도 한번 시도해보세요. 전체도 찍었다가, 부분도 찍었다가. 최종적으로 앨범을 만들거나 블로그에 그날 행사를 올릴 때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유도 경기 사진과 어린이날 사진을 통해, 등장인물 숫자에 따라 사진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은 이 사진들의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백년사진#조선일보#동아일보#사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