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던 사나이가 떠났다.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가 4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별예대 연극영화학과 재학 시절 ‘사육신’으로 연출로 데뷔했다.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갔던 휘문고 2학년 때 연극제를 열 정도로 당돌하고 끼 많은 소년이었다. 졸업한 후 세계일보, 조선일보, 대한신보 기자를 거쳐 동아방송과 KBS에서 PD를 했다. 또 국립극단 이사와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1969년 초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의 대표작. 1959년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부조리극의 대표적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접했다. 1953년 세계 초연했던 작품.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시종일관 얼토당토아니한 대화를 나누며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공연이 성공한 것을 계기로 1970년 극단 산울림이 탄생했다. 창단 멤버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초연 배우인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 김용림 사미자 윤소정 윤여정 손숙 등이다. 그해 10월 극단 창단 공연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이후 50여 년간 1500여 회 공연에 22만여 명의 관객이 그의 공연을 봤다. 고인은 과거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도, 극단 산울림도, 산울림 소극장도 ‘고도’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85년 고인이 아내인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와 함께 사재를 털어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신의 집을 헐고 지은 산울림 소극장은 고전 연극의 산실이었다. 이 곳에서 올린 첫 작품도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산울림 소극장은 ‘연극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연출가와 명배우를 배출했고, 연극이 침체됐을 때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붐을 주도하면서 중년 여성이라는 새로운 관객층을 개발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평일 낮 공연을 기획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대표적으로 박정자의 ‘위기의 여자’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손숙의 ‘담배 피우는 여자’가 산울림 소극장에서 탄생했다.
고인의 연출 스타일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자로 잰 듯한 연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희곡 분석 작업부터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그의 연출 노트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배우의 호흡과 동선, 심리 상태가 대본에 빼곡히 적혀있다.
고인이 한국 연극계의 대부로 불리는 까닭은 척박한 현실에서도 끝까지 무대를 지켰기 때문이다. 고인은 “한국에서 연극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가 술자리에서 했던 “산울림 소극장을 폭파하고 싶다”는 말은 유명하다. 극장을 폭파하면 사회면 톱기사가 돼 어려운 소극장 현실에 관심을 가져줄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고행과도 같은 소극장 운영을 그는 묵묵히 이어갔다. 연극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며 영원한 현역으로 남길 원한 고인은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70여 년간 활동하며 마지막까지 연극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산울림 소극장은 딸 임수진 씨가 극장장을 맡아 하드웨어를 담당하고 아들 임수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가 예술감독으로 콘텐츠 운영을 맡고 있다.
고인은 1966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옵서예’를 통해 본격적인 창작 뮤지컬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꽃님이!꽃님이!’ ‘지붕위의 바이올린’ ‘키스 미 케이트’ ‘갬블러’ 등을 연출하며 뮤지컬 연출의 초석을 닦았다.
고인은 동아연극상(1986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1995년) 동랑연극상(1995년) 보관문화훈상(2004년) 금관문화훈장(2016년) 등을 수상했다. 한국 극단으로는 최초로 1989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와 아들 수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산울림 소극장 예술감독), 딸 수진 산울림 소극장 극장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7일 오전 8시. 02-207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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