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우선순위는 이제 나” 70살에 ‘내 인생’ 찾은 모델 리송 [BreakFirst]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3일 0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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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모델 리송이 손수 챙겨온 본인 소유의 조각상과 등지고 앉았다. 쇼트커트에 오묘한 눈매가 마치 데칼코마니 같이 닮았다. 그는 한 전시에 갔다가 자신과 닮은 이 조각상에 매료됐다. 조각상 한쪽에 작가의 흘림체 사인이 ‘리송’이라 적혀 있어 운명이라 느꼈다. 알고 보니 ‘리’는 숫자 ‘21’이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백발의 청춘, 운동화를 신은 단신의 모델, 소년의 눈동자를 한 74세 노인….

모순적인 수식어들이 모두 적용되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시니어 모델 리송(74)입니다. 그의 키는 160cm 남짓입니다.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 수준이니, 모델이라기엔 작죠. 7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호기심이 서린 새까만 눈동자, 흰머리 섞인 숏컷에선 소년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집니다. 초 단위로 터지는 카메라 셔터보다 빠르게 포즈를 바꾸는 프로지만, 그는 50년을 가정주부로 살았습니다. 2019년 데뷔해 6년 차 모델이 됐습니다.

모든 외적 반전을 뛰어넘는 가장 큰 반전은 그의 내면에 있습니다. 한눈에 느껴지는 당당함과 쾌활함 뒤엔 흐릿해진 상처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결핍은 역설적으로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남편과 세 자녀에게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를 땅으로 여겨라. 나를 딛고 도약해라.” 그는 50년을 가족의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관성적인 삶에 익숙해집니다. ‘여태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송은 나이라는 관성에 얽매이길 거부합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70세의 나이에, 그는 이제 누구도 아닌 자신의 도약을 위해 스스로가 발판이 되길 자처합니다. 그의 무대는 런웨이에서 연극무대로, 영화 촬영장으로, 겁도 없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모로코 사하라 사막을 뒤로한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리송. 그는 지난해 4월 아프리카 모로코에 가 화보 촬영을 진행, 화보집 ‘LISONG In MOROCCO’를 발간했다. 화보집 중 발췌
리송과 낙타들. 리송은 일흔 셋의 나이에 처음으로 낙타를 타 봤다. 화보집 중 발췌
―‘리송’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합니다. 본명인가요?

제 본명은 이해자 입니다. 전 50년을 가정주부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제 안에서 무언가 쌓였어요. 시니어 모델을 하기로 하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새 출발을 하는 만큼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었습니다. 리는 저의 성에서 따왔고, 송은 제 남편 성입니다. 남편과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8년 연애 끝에 결혼한, 오랜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이제까지 제 옆에 있어 주는 가장 고마운 사람, 남편의 이름과 제 이름을 합쳐 리송이라 지었습니다.

―모델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평생을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전 엄마, 아내의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습니다. 우선순위는 제가 아닌 가족이었죠. 두 딸과 아들 하나가 있는데요,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열쇠를 들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늘 제가 집에서 맞아줬거든요. 외출을 해도 아이들 오는 시간엔 반드시 집에 왔습니다. 손주 여덟 명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줬어요. 그런데 막내 손자가 5살 되던 해에 ‘이제 내 손길이 필요 없겠다’ 싶더군요. ‘엄마와 할머니의 역할은 끝났다. 내 삶을 찾겠다’, 이 생각을 한 게 70세였습니다. 마침 그때 남편이 시니어 모델 패션쇼 기사를 보여주며 ‘당신도 해 보면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그날로 학원에 갔습니다.

―학원에 처음 간 날, 기억나시나요?

2시간 수업 참관이 가능하다고 해서 시니어 모델들이 워킹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1시간 수업이 끝나고 바로 등록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결정을 내렸느냐고요? 모델들의 ‘몰입’을 봤기 때문이에요.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몰입의 세계를 보고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등록하고 다음 시간에 바로 워킹을 해봤는데 어마어마한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엔 3cm 힐 신고 걷는 것도 버거웠는데 지금은 10cm도 거뜬합니다.

리송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7시~8시 요가를 한다. 주 3회는 요가를 하기 전 30분 동안 계단 130층을 스테퍼로 올라가는 유산소 운동을 한다. 나머지 이틀은 등, 팔, 다리 등 부위를 바꿔 가며 근력운동을 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리송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7시~8시 요가를 한다. 주 3회는 요가를 하기 전 30분 동안 계단 130층을 스테퍼로 올라가는 유산소 운동을 한다. 나머지 이틀은 등, 팔, 다리 등 부위를 바꿔 가며 근력운동을 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아직도 눈빛은 뭔가를 꿈꾸고 있는가. 호기심에 반짝이고 있는가.
본능에 각인된 끼는 세상이 먼저 알아봤습니다. 모델 학원에 다닌 지 4개월도 채 안 됐을 때인 2019년 10월 현대백화점이 개최한 ‘시니어 패셔니스타 콘테스트’에서 지원자 1500여 명 중 ‘톱 10’에 들어갑니다. 그해 ‘KMA시니어모델선발대회’에선 최우수상(65세 이상)과 우정상을 받았죠. 캐나다 밴쿠버 패션위크 런웨이부터 앙드레 김 패션쇼까지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리송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보니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

―생각보다 아담하세요. 작은 키가 모델 활동의 걸림돌이 된 적은 없나요?

제 키는 160cm입니다. 보통 여성 시니어 모델 키는 170cm가 넘어요. KMA시니어모델선발대회에선 제가 참가자 중 제일 작았어요. 시니어모델협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리송이 나오면 키가 안 보인다.’ ‘저 모델은 키가 작은데?’가 아니라 그냥 ‘리송이 걸어 나오네’라는 생각만 든다는 거예요.
모델은 날씬하고 키가 커야 한다는, 틀에 짜여진 개념이 있잖아요? 시니어 모델은 달라야 합니다. 키가 작아도, 통통해도,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도 됩니다. 얼굴 전체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평생 축적된 마음의 근육들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길 바랍니다. 얼마나 많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 아직도 눈빛은 뭔가를 꿈꾸고 있는가. 호기심에 반짝이고 있는가. 그래서 전 ‘소년 같으세요’라는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시니어 모델’이라고만 하기 어려운 것이, 연극 무대에도 활발히 오르고 계신다고요.

39살이 되던 해 가슴 속에 차 있는 뭔가가 분출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욕구가 차올랐어요. 그 때 극단에 들어가서 약 10년 동안 가사와 연극을 병행했어요. 연극을 경험하면서 핀 조명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노 파트를 소화하는 게 꿈이었거든요. 제가 만든 ‘리송 극단’에서 스페인 극작가 세르지 벨벨의 ‘죽음 혹은 아님’이라는 작품으로 올해 2월 공연을 했어요. 20분 동안 혼자 대사를 읊는 것을 해낸 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제 실력이 성에 차지 않아서 눈물을 흘려가며 연습했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귀하단 걸 느끼니 스스로를 밀어붙이기도 해요. ‘이 정도면 됐어’라는 관성에 젖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올해 2월 ‘씨어터송’에서 열린 연극 ‘죽음 혹은 아님’에서 울분을 토하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리송. 리송 제공
―지난해 4월엔 아프리카 모로코 배경의 화보집을 내셨고, 최근엔 영화 촬영도 하셨다고요. 또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 있나요?

최근에 친한 사람들과 ‘스타 인’이라는 시니어 창작자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시니어들이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기획하는 일종의 기획본부입니다. 제가 남편과 주말마다 충북 괴산에 내려가는데 그 시골에서 만나는 노인분들 가슴에 다 열정이 있어요. 꼭 화려한 옷일 필요 있나요? 시장에서 파는 5000원짜리 몸빼바지(왜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워킹해보는 경험만으로도 그분들의 자존감은 엄청 살아날 거예요. 지방에 가서 연극을 할 수도 있고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파장을 일으키듯 작은 활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온다면 큰 행복이 될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아주 강한 결핍은 아주 강한 사랑이 됐습니다.
리송은 젊었을 적 어깨가 드러나는 오프 숄더 상의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습니다. 경찰들이 자를 들고 다니며 치마가 무릎 위 20cm 이상인지를 재던 시절이었죠.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사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고, 요즘 유행하는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대학생 때부터 신고 다녔습니다. 넘치는 끼를 오롯이 분출하기까지는 5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스물셋의 나이에 결혼한 뒤부턴 가족에 헌신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1년 동안 약국을 운영하시기도 했고, 연극도 하셨어요. 그런데 한동안 가정주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희 부모는 저를 많이 사랑하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직업군인 아버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 모두 아주 엄격했습니다. 그들이 정한 규율에 따라 행동해야 했고, 양말과 속옷도 어렸을 때부터 직접 빨아 입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과 관심이란 걸 깨달았어요. 제가 받고 싶은 사랑만큼을 남에게 주는 게 몸에 뱄죠.

그래서 주부의 길을 택했습니다. 내 가족에게 모든 사랑을 다 줘야 했기 때문에요. 제 머릿속은 굉장히 자유롭지만 스스로 적용하는 규정들은 꽤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올 때 반드시 집에서 맞아야 한다’, ‘이유식은 절대 남은 걸 데워 먹여선 안 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등 저 자신에게 아주 엄격했습니다. 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아는 인간 중 네가 가장 프로페셔널하다’고요. 네, 저는 프로페셔널 엄마이자 아내였습니다.

대학 시절 리송은 짧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왼쪽). 집에서 손자와 함께 탁구를 하는 모습. 리송 제공

―사랑의 결핍이 사랑의 힘을 가르쳤다니, 역설적이네요.

반면교사는 가장 훌륭한 교사입니다. 아주 강한 결핍이 아주 강한 사랑으로 변한 거죠. 전 남편과 세 아이에게 땅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전 습관처럼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땅이라고 생각해라. 나를 딛고 도약해라. 내가 늘 단단하게 있겠다.’

―누군가의 발판이 되기 위해 땅으로 존재하면서 갑갑함은 없으셨나요?

왜 없겠어요? 제 친구가 묻더라고요. 그 많은 끼를 어떻게 상자 속에 꾹꾹 밟아 놓고 살 수 있었는가. 제 숨 쉴 곳은 책이었습니다. 저처럼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겐 물음이 있어요. ‘내가 더 잘했으면 결과가 더 나아졌을까’라는 자책,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 책을 읽음으로써 의문과 자책에서 자유로워졌어요. 나를 붙들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결론을 내린 순간이 왔으니까요.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저를 막지는 못합니다.

책을 통해 자책과 의심을 극복하신 거네요. 리송 님의 ‘인생 책’을 한 권 꼽는다면요?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이요. 주인공 올렌카는 사랑하는 마음을 타고난 여인입니다. 그는 세 명의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 그의 긍정이었습니다. 그는 두 남편과 사별했고, 혈육이 아닌 아이를 돌보지만 늘 상대의 장점만 보고 헌신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요. ‘삶은 이런 태도로 살아야 하는구나’를 배웠습니다. 제 머릿속에 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말의 리송(왼쪽)과, 평일의 리송이다. 주말의 그는 괴산에 있는 시골집에 내려가 손수 요리를 해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이날도 육개장을 끓여 마을에 돌렸다. 주중의 리송은 런웨이에 오르고, 화보 촬영을 한다. 오른쪽은 앙드레 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른 그의 모습. 리송 제공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평범하다고도, 비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교 자체로 두 사람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세요.
따뜻한 남편과 잘 자란 세 자녀, 70세에 전성기를 맞은 톱 시니어 모델. 일면 그는 부족한 것 없고, 원하는 건 다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엔 백조의 발길질이 있었습니다. 그는 2022년 출간한 에세이집 ‘리송,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나를 이겨가며 나를 넘어온 사람이다.’ 리송은 유년시절의 아픔, 스스로를 향한 의구심과 자책을 호기심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채워 왔습니다.

―가정에 헌신한 주부에서 프로 모델이 되기까지 평범과 비범 사이를 무수히 오가셨는데요, 본인은 둘 중 어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평범과 비범은 주변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 나누게 되잖아요. 전 절대 남과 비교하지 않아요.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하다고도, 비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교하는 자체로 이미 두 사람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그 사람이 가진 강점을 봐야 해요. 제가 남들과 좀 다른 점은 호기심으로 늘 눈빛이 살아있다는 것, 그 정도입니다.

―리송 님의 가장 큰 호기심은 어딜 향해 있나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근육과 표정이 서서히 펴지는 걸 볼 때 행복해요. 그 과정은 마치 꽃봉오리가 서서히 벌어져 만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아요. 전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요. 누군가의 뒷모습은 굳이 발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점은 내가 책임질 게 아니지만, 장점은 배울 수 있잖아요.

―알을 깨고 싶지만 선뜻 용기 내지 못하는 리송님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매일 매일을 새로운 시작으로 봐요. 지나간 건 지나간 거예요. 앞을 봐야죠.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감사하고 귀하거든요.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살아요. 제가 지나고 있는 이 구간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저는 이 구간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합니다. 과정을 늘 웃으면서, 깨어있으면서, 타성에 젖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해나가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각자 다르겠지만 일단 해 보세요. ‘난 나이가 들었으니 됐어’, 이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리송은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고 싶다고 밝혔다. ‘죽도록 열심히 사랑하고 갔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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