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타일과 철창으로 둘러싸인 수감시설. 희뿌연 안개 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 몸이 돼 바닥을 구른다. 입술이 닿은 채 회전하고, 서로의 신체 굴곡을 따라 미끄러지며 격정적인 춤을 춘다.
8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국내 초연된 댄스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이다. 동명 클래식 발레에서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우아한 2인무 ‘발코니 신’이 세계적 안무가 매슈 본의 손을 거쳐 파격적으로 재창작됐다. 본은 클래식 발레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며 올리비에상을 무려 9차례 받은 영국의 스타 안무가다. 그의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된 건 2019년 ‘백조의 호수’ 이후 5년 만이다.
‘두 젊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소재를 제외하곤 원작의 서사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현대적으로 각색됐다. 원작인 셰익스피어 동명 소설의 큰 틀을 이루는 두 가문 간 갈등은 등장조차 않는다. 또 원작의 배경인 이탈리아 베로나 공국은 청소년 교정시설 ‘베로나 인스티튜트’로 탈바꿈했다. 주인공 줄리엣은 내면의 악마와 싸우는 문제아로, 로미오의 두 친구는 동성 연인으로 등장해 성 정체성과 폭력, 사랑 등 오늘날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문제를 중점적으로 비춘다.
대사, 마임 없이도 서사를 촘촘하게 보여주는 안무는 연극을 보는 듯한 재미를 줬다. 경비원에게 학대받는 친구를 구출하고자 다급히 뛰어다니며 머리를 싸매는 동작 등은 상황을 직관적으로 전달했다. 음악을 시각화한 안무도 강점이다. 통상 발레 공연에서 볼 수 없는 앞구르기, 주먹 지르기 등의 동작을 활용해 박자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다만 1300여 석 규모 대극장의 무대를 채우기엔 군무 등이 빈약했고, 무대 연출에서도 허전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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