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호텔이 사라지는 나라에서 [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28일 13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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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인이 머물렀던 유성호텔 내  VIP 객실. 그동안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으나 올해 3월 폐업을 앞두고 공개했다. 대전시 제공
사진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인이 머물렀던 유성호텔 내 VIP 객실. 그동안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으나 올해 3월 폐업을 앞두고 공개했다. 대전시 제공
대전 유성호텔에 들렀던 것은 지난해 6월이었다. 한 협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전역에서 택시를 잡았고, 70대쯤 돼 보이는 택시 기사와 대화를 나눴다. 내가 먼저 “온라인에서 대전을 ‘노잼’ 도시라고 놀리는 일종의 유행이 있다”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화제는 휙휙 바뀌었는데, ‘여기가 바로 칼국수의 도시입니까?’ 물으며 한국을 ‘차붐의 나라’로 알고 온 독일 축구 선수 같은 눈망울을 택시 기사 쪽으로 지어 보이기도 했다.

화제가 유성호텔로 넘어갔다. 나는 호텔이 조만간 사라진다는 뉴스를 봤다고 했다.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호텔이 사라진다는 말에 오래된 토박이였던 택시기사가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일 줄만 알았다. 정작 택시기사는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라며 덤덤했다. “한땐 대단했죠. 유명한 사람들이라면 다 거기 들렀으니.”

자부심과 담담함. 오래된 것들에 느끼는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말투였다. 삶과 기억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순순히 알고 있었다는 말투. 그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 출입처에서 오래 일한 기자, 오랜 경력의 개인 택시기사, 공인중개사, 동네 이삿짐센터 사장, 철물점 주인에게서도 비슷한 말투를 들었던 것 같다. 사라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봐온 사람들이 그런 표정을 짓는다.

택시 기사는 100년을 넘은 것이 있다는 건 기특하지만, 그게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놀랍지는 않은 것이다. 그 순간, 그게 서울이든 대전이든 대도시를 오래 버티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미 진작에 받아들였어야 할 태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라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그렇죠. 장사가 안 되면 그렇죠.” 상대의 반응에 따라 맞장구를 치는 것은 기자라는 직업적 버릇이다. 나도 노회해간다. 사라지는 것을 회한 없이 입에 올리고 말았다. 말을 멈추고 택시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호텔 앞이었다.

유성호텔은 올해 3월 문을 닫았다. 1915년 온천 관광지에 선 여관으로 시작한 뒤 109년 간 지역을 대표하는 호텔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선수촌호텔로 쓰였다.

1993년 대전엑스포 기간에는 본부 숙소로 지정됐다. 마지막까지 쓰인 건물은 1966년 옮겨서 만든 것이다. 그 뒤로 58년이 지나면서 시설도 낙후했다는 말을 들었다. 워낙 튼튼히 지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낡아가는 것 또한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유성호텔은 채도가 낮은 벽과 바닥 색감으로 한 시절을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가 되자 그것은 현대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그러다가 온천관광 열기가 꺾이고 코로나19 때 타격을 입자 버틸 수 없게 됐다.

호텔 측은 폐업이 다가오자 투숙객에게 100년 전 유성호텔을 새긴 목욕 바가지와 단지 모양의 바나나 우유, 초코파이를 제공하기도 했다. 나는 유성호텔을 다시 들러서 객실에서 씻고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어쩐지 그게 사라지는 것을 기리려는 마지막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목욕재계하고 뇌까지 쨍한 단맛의 기억으로 사라짐의 의미를 몸에 남기는 행위.

그러다가 생각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고. 누군가 사라짐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면 반박할 수 없고 어디가서 이렇게 말했다간 아무것도 모른다고 면박당할 걸 알면서도, 시무룩한 채로 겨우 후끈하고 쨍한 욕조의 감각이 남아서인지 뭐 어쩌자는 의도 없이 다시 읊조린다. 사라지고 있다. 많은 것들이.

최근 사라진 호텔 중 유성호텔만 있는 것은 아니다. 40년 역사를 지닌 서울 남산 밀레니엄 힐튼 호텔은 지금 철거 작업 중이다. 이제 그 자리를 헐고 주상복합이 들어선다. 제주의 랜드마크 중 한 곳이었던 제주 칼호텔 역시 2022년 문을 닫았다. 48년 만이었다.

내가 그 소식을 듣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제 곧 헐릴 남산 힐튼 앞을 걷고, 그 호텔의 마지막을 기록한 전하영 소설가의 단편(JHY를 위한 짧은 기록)을 읽다가 ‘여기 힐튼 호텔이잖아’라고 나지막하게 말해보는 것. 15년 전 제주도 첫 여행에서 렌트카로 제주 칼호텔 앞 도로를 지나다가 우뚝한 건물에 쓰인 KAL 글자를 본 기억을 떠올리는 것.

그날 택시기사는 호텔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 일대가 한땐 정말 대단했다구요.” 나는 그 말투 또한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라지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면서도 문득문득 예전의 한 장소로 돌아가서 그 장면을 무연히 떠올려 보는 사람.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죠’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일 사람. 그러나 다시 바뀌는 풍경을 감내하는 사람. 문득 샤워하다가 ‘정말 사라지고 있긴 해’라고 중얼거릴 사람.

“정말 그래요. 거기 있던 식당 또 없어졌더라고요.” 나는 오늘도 점심을 먹다가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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