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결혼을 하고 마지막 남편을 떠나보낸 노년의 버나는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마주친 남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는 얼어 버린다. 밥 고엄. 고등학교 동문이자 50년 전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인생을 크게 비틀어 버린 남자다. 순간 버나는 여행을 취소하고 돌아가야 하나, 도망가야 하나 고민한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내가 왜 도망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 버나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단편 ‘스톤 매트리스’다. 줄리앤 무어와 샌드라 오가 출연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인 이 소설에서 애트우드는 중년 버나의 결코 평온하지 않은, 욕망과 외로움과 복수심이 불타는 심리를 가차 없이 묘사하며 묻는다. 새로운 인생을 잘 살고 있다면 해묵은 과거는 돌려보낼 수 있을까? 나이가 들면 모든 것에 초연해지고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단편집의 다른 소설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양로 시설 ‘암브로시아 매너’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월마는 “나이가 들면 몸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몸에 초연하고 비육체적인 고요의 왕국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것은 황홀경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황홀경은 몸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런가 하면 ‘죽은 손의 사랑’은 학생 시절 룸메이트들에게 빌붙어 사는 대가로 성공하면 인세를 나눠 갖기로 계약한 작가 잭의 이야기를 다룬다. 잭은 결국 룸메이트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예전에 한 계약 때문에 수십 년간 착취를 당한다고 여기다가, 룸메이트들과 재회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 이번 단편집에서 애트우드는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환상과 은유의 기법을 과감하게 다룬다. 판타지 소설가가 과거의 연인을 작품 속에 봉인하고, 여자 괴물이 등장하며, 잘린 손이 스스로 움직이기도 한다. 애트우드 특유의 거침없는 신랄함과 유머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단편으로 좀 더 경쾌한 즐거움을 선사할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