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멀리… 몸은 낮게 보라, DMZ 식물 세상[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1일 01시 40분


북방계 식물 전시원에서 만날 수 있는 북한 식물 백두산떡쑥.
북방계 식물 전시원에서 만날 수 있는 북한 식물 백두산떡쑥.
난생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흰색 떡고물을 열매에 보슬보슬 버무려 빚은 듯했다. ‘백두산떡쑥’이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이곳은 강원 양구군 해안면에 2016년 문을 연 국립DMZ자생식물원. 이 식물원은 9개 주제원(園) 중 백두산떡쑥 등이 있는 북방계 식물 전시원을 1년에 딱 2주간, 5월 말에서 6월 초(올해는 9일까지)에만 개방한다. 진귀한 우리 식물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다.

인근 DMZ펀치볼둘레길, 대암산 용늪, 두타연에도 야생의 위로가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우리 식물을 참 많이 만났다. 시야를 넓혀서 걷다가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들여다봐야 가능한 만남이었다. 허둥지둥 앞만 보고 가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시 ‘풀꽃’에서 읊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북한-북방계 식물을 만나다

달콤한 꽃향기를 풍기는 댕강나무들.
달콤한 꽃향기를 풍기는 댕강나무들.
이른 오전 국립DMZ자생식물원에 도착하자 서늘한 기운이 몸을 파고들었다. 해발 670m에 자리 잡은 국내 최북단 식물원답다. 댕강나무들의 달콤한 꽃향기를 거쳐 전망대에 이르자 펀치볼이 시야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휴전선과 맞닿은 우리나라 최대 분지로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펀치볼(punch bowl·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이름을 붙였다. 처절했던 전쟁의 아픔을 지닌 이 침식분지는 종전 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생태계 고유 모습을 간직하게 됐다.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진 북한 매봉이 가칠봉과 을지전망대 사이로 손에 닿을 듯 보인다. 저 북녘땅에 사람이 살고, 우리 식물도 산다.

북방계 식물 갯활량나물.
북방계 식물 갯활량나물.
이 야외 식물원에는 희귀식물이 즐비하다. 특히 북방계 식물 전시원에서는 북한 식물과 북방계 식물을 만날 수 있다. 남한엔 살지 않고 북한에만 사는 식물을 북한 식물, 빙하기에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남하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식물을 북방계 식물로 분류한다. 북방계 식물 전시원에는 백두산떡쑥과 오랑캐장구채를 비롯해 북한 식물 30여 종, 만병초와 갯활량나물 같은 북방계 식물이 200여 종 있다.

강원 양구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볼 수 있는 북한 식물 오랑캐장구채.
강원 양구 국립DMZ자생식물원에서 볼 수 있는 북한 식물 오랑캐장구채.
북한 식물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이 식물원은 과거 북한 주변 지역으로부터 구했던 종자를 발아시켜 보전하고 있다. 세계 여러 식물원과 종자를 교류하고, 개인 수집가들에게서 식물을 기증받기도 한다. 이들 식물은 서늘한 날씨에 배수가 잘되는 토양인 펀치볼 일대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탄소 배출을 줄이지 않아 지구를 뜨겁게 달군다면 기후변화에 취약한 이들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구슬댕강나무 뒤로 멀리 양구 펀치볼이 내려다보인다.
구슬댕강나무 뒤로 멀리 양구 펀치볼이 내려다보인다.
문득 지난해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 열린 ‘식물 평행세계’(조경진 조혜령 작가)라는 이름의 전시가 떠올랐다. 같은 종(種)이지만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식물들로 하나의 정원을 만들었다. 비정치적 존재인 식물에 두 개의 이름을 안긴 분단 현실이 안타까웠다. 식물은 죄가 없다. 우리가 고광나무라고 부르는 식물을 북에서는 조선산매화라고 부른다. 귀룽나무는 구름나무, 백당나무는 접시꽃나무로 불린다. 우리 이름도, 북의 이름도 곱다. 외딴 양구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식물 연구진은 “우리가 북한 및 북방계 식물을 충분히 연구해 둬야 식물 통일을 대비할 수 있다”고 한다.

산림청 지정 멸종위기 희귀식물 부채붓꽃.
산림청 지정 멸종위기 희귀식물 부채붓꽃.
국립DMZ자생식물원은 국내 유일의 고층 습원(해발 1280m)인 대암산 용늪을 본떠 고층 습지원도 조성했다. 사초, 동의나물, 참조팝나무, 산수국 등이 자연스럽게 군락을 이뤘다. 저층 습지 연못가에는 부채붓꽃과 제비붓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붓꽃을 유독 좋아했던 세계적 화가 고흐(1853∼1890)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와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붓꽃 60∼70%가 희귀식물이지만, 특히 부채붓꽃은 산림청 지정 멸종위기 희귀식물이다. 부채처럼 퍼지는 잎과 붓을 닮은 보라색 꽃이 볼수록 신비롭다.

●DMZ 비밀의 숲에서 보낸 찬란한 하루


국립DMZ자생식물원 뒤편 DMZ펀치볼둘레길이야말로 비밀의 숲이었다. 금강초롱꽃, 함박꽃나무, 관중, 금강제비꽃, 도깨비부채, 쪽동백나무, 감자난초 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둘레길이 전국 어디에 또 있을까. 다만 기억할 것! 시야는 넓게, 몸은 낮춰야 작고 담백한 우리 식물이 보인다는 것을.

DMZ펀치볼둘레길 ‘부부 소나무’ 너머로 펀치볼을 조망할 수 있다.
DMZ펀치볼둘레길 ‘부부 소나무’ 너머로 펀치볼을 조망할 수 있다.
총길이 73.22km의 DMZ펀치볼둘레길은 산림 휴양 통합 플랫폼 ‘숲나들e’(foresttrip.go.kr)에서 예약하고 방문해야 한다. 평화의 길, 오유밭길, 만대벌판길, 먼멧재길 등 네 가지 길 가운데 골라 걸을 수 있다. 그중 추천하고 싶은 길은 오유밭길이다. 우리 식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걷다가 다다르는 ‘부부 소나무’ 전망대에서 펀치볼을 전망할 수 있다. 한 그루인 듯 두 그루인 부부 소나무 사이에 있는 또 한 그루의 소나무는 자식일까.

오유밭길에서는 쪽동백나무가 숲길에 깔아준 ‘하얀 별 카펫’을 밟았다. 쪽동백나무가 떨군 하얀 꽃은 다른 행성에서 지구로 불시착한 별일지도 모른다. 고광나무도 한창 순백의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싱아도 만났다. 박완서 작가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던 그 싱아는 싱그러운 풀이었다.

잊지 못할 순간은 주먹 크기의 꽃을 주렁주렁 매단 함박꽃나무를 만났을 때였다. 말간 얼굴의 꽃이 나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주는 것 같아 괜히 눈물이 났다. 나 힘들다고 애써 설명하지 않았는데 알아봐 주고 환하게 지어주는 그 함박웃음 . 누군가에게, 때로는 스스로에게 저 따스한 웃음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전쟁의 상처를 다독여주는 국립DMZ자생식물원 ‘워(War) 가든’ 철조망 앞에 피어 있는 꽃도 함박꽃이었다.

DMZ펀치볼둘레길을 걸어 본 다음 국내 람사르 습지 1호인 대암산 용늪으로 향했다. 해발 1280m로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굽이굽이 비포장 임도(林道)를 30분 정도 운전해야 다다를 수 있다. ‘반만년 생태계의 신비, 대암산 용늪’이라고 적힌 표지판에는 네 개의 관련 부처 설명이 달려 있다. 산림청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환경부는 람사르 습지, 국가유산청은 천연보호구역, 국방부는 통제보호구역으로 관리하는 곳. 용늪은 철쭉이 이제야 한창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한 달여를 거슬러 올라간 또 다른 세계였다. 용늪에 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DMZ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생태 공간이었다.

1000년 전 있었다는 사찰 두타사에서 유래한 두타연. 물줄기가 모여 한반도 같은 모양을 만든다.
1000년 전 있었다는 사찰 두타사에서 유래한 두타연. 물줄기가 모여 한반도 같은 모양을 만든다.
양구에 간다면 금강산에서 발원한 힘찬 물줄기가 원시 절경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두타연도 방문하기를 권한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서는 ‘평범한 날들의 찬란한 하루’라는 제목의 전시도 열리고 있다. 박수근 화백의 식나무 그림, 그가 식물을 그릴 때 참고한 목련 그림도 전시돼 있다. 위대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국립DMZ자생식물원의 북방계 식물 전시원이 잠시 열려 있는 이번 주말, 양구에 가보면 어떨까. 평범한 날들의 찬란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dmz 식물#북한-북방계 식물#비밀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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