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특별전, 한달새 7만명 방문
장년층중엔 관람중 눈물 흘리기도
“만화-청소년판에 드라마도 제작
대중과 소통하며 생명력 유지”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토지를 쓰던 세월展’. 5㎡(약 1.5평) 남짓한 ‘작가의 방’에 들어서자 방안을 가득 채운 200자 원고지 수백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 박경리(1926∼2008)가 대하소설 ‘토지’에 쓴 문장을 인쇄한 것이었다.
원고지 곳곳엔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와 같이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이 가득했다. 광복을 맞이한 사람들을 그려낸 ‘토지’의 마지막 문장(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처럼 감동적인 문장도 눈에 들어왔다. 생전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도 없었다”고 말한 박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하소설 ‘토지’ 완간 3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3일 개관한 이번 무료 전시엔 이달 3일까지 한 달간 약 7만 명이 다녀갔다. 전시는 올 12월 31일까지 열린다. 전시를 기획한 안지혜 다산북스 브랜드관리팀장은 “20, 30대 연인은 데이트 코스, 40대 부모는 아이들 현장학습 차원에서 방문하고 있다”며 “장년층 방문객 중엔 전시장을 둘러보다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었다”고 했다.
‘토지’는 박 작가가 1969년 6월부터 1994년 8월까지 쓴 소설이다. 1897년 조선 말기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지는 48년의 역사를 담았다. 등장인물만 700여 명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이르는 대작이다. 그동안 팔린 ‘토지’의 판매량은 정확히 추정되지 않지만 360만 권 이상으로 알려졌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로 일부 번역됐고, 일본엔 올 9월 20권이 모두 번역 완간될 예정이다.
완간된 지 30년이 지난 ‘토지’의 인기가 식지 않는 건 요즘 독자들에게 맞게 접점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문화재단은 지난해 6월 출판사 다산책방을 통해 20권짜리 토지 개정판을 내놓았다. 젊은 독자들을 위해 인물 계보 및 어휘 소개 등을 넣은 개정판은 2만2000부가 팔렸다. 지난달부터 내년 2월까진 독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박 선생 작품에 대한 감상평을 올리면 기념품을 주는 ‘독서 챌린지’도 운영한다. 박 작가의 외손자인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관장은 “‘독서 챌린지’는 모집을 시작하자마자 모집인원 100명을 달성했다”며 “박 작가의 작품이 긴 생명력을 지니고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다양한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토지’가 최근 학부모 사이에서 교육용 도서로 주목받는 것도 이유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토지’(전 20권·다산책방) 구매자의 22.2%가 40대 여성이다. 이는 40대 남성 11.8%에 비해 2배 가까이 높은 비중이다. 주로 대하 역사소설이 중년 남성에게 인기를 끄는 출판계 흐름과 다른 기류다. 최근 문해력 논란이 커지자 한국어의 다양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기를 끄는 것이다. 학부모 사이에서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는 책”, “우리말 어휘와 문장의 보물 창고”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책 읽지 않는 시대, ‘토지’의 변하지 않는 인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김종회 문학평론가(전 박경리 토지학회장)는 “‘토지’는 만화와 청소년판처럼 젊은 독자가 선호하는 출판물로 펴내고, 1979·1987·2004년 3차례 드라마로 만들어 대중성을 유지했다”며 “기피 대상이 된 대하소설이 어떻게 현대판 고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긍정적 사례”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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