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녹나무의 파수꾼’에 이어 인연 소중함 깨닫는 여정 담아
악인도 범죄도 없는 추리소설… 선한 이야기가 주는 카타르시스
◇녹나무의 여신/히가시노 게이고 지음·양윤옥 옮김/399쪽·1만8800원·소미미디어
“소중한 사람의 마음은 알고 싶은 것. 하지만 알게 되면 대가가 따른 답니다.”
신간은 2020년 히가시노 게이고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베스트셀러 ‘녹나무의 파수꾼’의 속편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됐다. 전편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절도범이 된 레이토가 이모 지후네의 도움으로 월향신사에서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면서 삶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속편에는 한층 확장된 세계관에서 레이토가 주변 인물과 얽히며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여정이 담겼다.
월향신사의 좁은 덤불 숲을 따라가면 나오는 장엄한 녹나무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녹나무의 진짜 영험한 기능은 직계가족 간 염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념’. 초하룻날 녹나무 속 동굴에 들어가 초를 켠 뒤 염원을 맡기는 건 ‘예념’, 보름날 그 염원을 전달받는 행위는 ‘수념’이다.
속편은 녹나무를 찾아온 손님이 쓰러지는 바람에 레이토가 잠시 신사를 비우면서 시작된다. 강도 사건 피의자로 의심받는 구메다 고사쿠가 그날 녹나무에 숨어들면서 월향신사와 레이토가 경찰 수사 대상이 된 것. “나는 억울하다”고 토로하는 구메다의 말은 진짜일까. 때마침 직접 쓴 시집을 대신 팔아달라며 신사를 찾아오는 여고생부터 매일 잠들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소년까지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레이토를 중심으로 촘촘히 엮이는 이야기가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추리소설계 거장으로 30여 개국에서 책을 펴낸 저자는 한국에도 팬층이 두텁다. 1985년 등단 이래 매년 2, 3권씩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지금까지 100권 넘게 출간했다. 일각에선 “작품 수준의 편차가 크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초기작 ‘백마산장 살인사건’(1986년)과 같은 정통 추리물부터 ‘백야행’(1999년) 같은 사회 추리물, 휴먼 드라마와 공상과학(SF)을 곁들인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012년)에 이르기까지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린 시절 만화조차 읽지 않을 정도로 책을 멀리해서였을까.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은 책을 낯설어하는 독자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다. 신작 역시 녹나무라는 환상적인 매개체를 활용해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매일 얼굴을 맞대는 가족이라도 마음속 깊은 생각을 터놓는 건 어렵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녹나무의 도움으로 서로의 염원에 가까워지며 공감과 유대를 형성한다.
지독하게 못된 악인이 치밀한 트릭을 사용하고, 그 존재를 집요하게 밝혀내는 탐정이 등장하는 일반 추리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악(惡) 대신 선(善)을 차분하게 묘사하는 문체가 다른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특히 전편보다 어른스러워진 레이토가 주도적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모습을 보면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이모 지후네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전편을 읽었다면 레이토가 파수꾼의 역할에 대해 지후네와 설전을 벌이거나, 특유의 잔꾀를 부리는 모습 등 익숙하고 반가운 장면을 곳곳에서 찾아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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