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선 국가정체성 흔든 ‘삼전도 굴욕’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8일 01시 40분


◇아버지의 그림자/계승범 지음/264쪽·1만7000원·사계절


“명 황제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광해군)께 죄를 짓겠나이다.”

1619년 광해군에게 올린 조정 신료들의 ‘협박조’ 상소는 4년 뒤 쿠데타(인조반정)를 예고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사대(事大)의 의리를 좇아 1만4000명의 군사를 요동에 보내 명을 도왔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후금(훗날 청나라)에 궤멸적 패배를 당한다. 이에 광해군이 명나라의 증병 요청을 외면하며 후금과 화해를 모색하자, 신료들이 집단 항명에 나선 것. 이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척화파와 주화파의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망국 직전의 대국(명)을 위해 조선 관료들이 망국의 위기를 무릅쓴 이유는 무엇일까.

서강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당시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이 모두 조선의 국가정체성과 직결돼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단순히 딸깍발이 선비들의 사대주의 집착이 낳은 비극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것. 조선 성리학의 정치질서에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혹은 왕-사대부-평민의 충효(忠孝) 관계와 같았다는 얘기다. 결국 명에 대한 사대 의리를 지키지 않는 건 국내 정치의 정당성을 잃을 수 있음을 뜻했다.

실제로 조선 사림의 거두 송시열은 “삼전도에서 항복을 용인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으며, 결국 노비도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금수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제정치 현실과 무관하게 효종대 북벌론이 추진된 배경이 됐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조선#국가정체성#삼전도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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