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등 1년간 기획-연구
진화 알고리즘-딥러닝으로 복원
“고음악 등 레퍼토리 확장 기대”
집박(執拍·박을 치는 사람)이 깔끔한 박 소리를 울리자 아쟁의 장대한 선율과 떨림이 시작됐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17명이 각자 거문고, 피리, 장구 등으로 맛깔난 시김새(장식음)와 박자를 얹으며 오래전 사라진 궁중음악을 세상에 다시 들려줬다. 인공지능(AI)의 도움 덕분이다.
생성형 AI로 복원한 15세기 궁중음악 ‘치화평’과 ‘취풍형’이 2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공연됐다. 세종이 창제한 무용음악 ‘봉래의’ 중 여민락은 16세기 이후 민간을 통해 전승됐으나 나머지 두 곡(치화평, 취풍형)은 악보로만 전해 내려왔다. 이에 진화 알고리즘과 딥러닝이라는 AI 기술로 두 곡을 복원해 냈다.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원과 AI 음악 전문업체 크리에이티브마인드, 서강대 아트앤드테크놀로지학과가 약 1년간 공동으로 기획, 연구한 끝에 이뤄졌다. 크리에이티브마인드가 개발한 진화 알고리즘은 여민락의 거문고 악보를 토대로 거문고와 다른 악기들의 선율 규칙을 분석해 치화평과 취풍형의 합주 선율을 도출했다. 서강대 아트앤드테크놀로지학과의 딥러닝 기술은 정악보 수록곡 85개에 대한 악기별 정간보(井間譜·소리의 길이와 높이를 표시한 조선시대 악보) 데이터를 AI에 학습시킨 뒤 치화평·취풍형의 피리, 거문고 등의 선율을 완성했다.
그동안 AI 도움 없이 고음악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한계가 있었다. 조선시대 악보에는 빠르기나 기준음 등 실제 연주에 필요한 요소가 기록되지 않아서다. 박정경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은 “사람이 복원한 고음악 연주는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며 “반면 데이터에 입각한 AI는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조성(調聲) 변경처럼 사람이 하려면 수개월씩 걸리는 작업을 AI는 단 하루 만에 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두 AI 기술은 각기 다른 음악을 내놓았다. 딥러닝으로 복원된 연주가 진화 알고리즘 방식보다 완성도가 높아 연주자들의 사후 보정 작업을 덜 필요로 했다. 이는 진화 알고리즘 방식이 서양 악보에 기반한 반면에 딥러닝은 광학인식기술로 정간보를 통째로 인식해 국악 음계에 더 근접한 데 따른 것이다. 고보석 거문고 연주자는 “진화 알고리즘 방식은 음역과 주법에서 다소 어색함이 있어, 음역을 조정하고 시김새와 대점(거문고를 내려치는 주법)을 추가해 연주했다”고 말했다.
AI 복원 기술은 향후 고려가요 등 악보만 남은 고음악을 국악 공연 레퍼토리로 들려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다샘 서강대 아트앤드테크놀로지학과 교수는 “AI는 완전히 새로운 곡을 창작하기보다는 규칙과 분포에 맞는 음을 채워 넣는 작업에 특화됐다. 기존 틀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곡을 만들어 국악 레퍼토리를 넓힐 수 있다”고 말했다. 심영섭 국악작곡가는 “우리 음악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문법을 개발함으로써 국악 다양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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