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유목민은 침략자나 살생자, 파괴자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졌다. 역사가 기록과 건축물을 중심으로 서술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실상 훈족, 아랍인, 몽골인, 흉노족 등 수많은 유목민은 헝가리부터 중국까지 유라시아 대륙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영국인 작가로 유목민 연구에 천착해 온 저자는 정착민 중심의 기존 역사를 ‘반쪽짜리 역사’에 불과하다며 유목민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이 책은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간접적으로만 그 실체를 파악한 유목민의 실체를 각종 신화와 현지 답사, 인류학, 생물학 등의 다양한 연구 성과를 종합해 분석한다.
유목민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조직력을 갖춘 집단이었다. 1994년 발견된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에선 무게 16t, 높이 5.5m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발견됐다. 기둥에는 멧돼지, 전갈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주변에선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사는 다마사슴, 멸종된 오록스 같은 다양한 동물 뼈들이 나왔다. 흥미롭게도 거주지였다면 발견됐을 법한 쓰레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저자는 기원전 9500년부터 유목민들이 방랑의 삶을 살면서도 수준 높은 축조 기술과 종교 의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유목민의 삶의 방식은 유전자에도 남아있다. 2008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연구팀이 케냐의 유목민과 정착민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DRD4-7R’이라는 변이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 유전자를 보유한 유목민들은 체력과 영양 상태가 좋았지만 정착민들은 이를 갖고도 체력 등이 좋지 않았다. 일명 ‘유목민 유전자’로 불리는 DRD4-7R 보유자들은 현대의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더라도 유목 환경에선 누구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변방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맞물려 유목민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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