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팬의 기이한 한국 여행… 한국계 해외 작가 데뷔작 화제
닿을 수 없는 존재 향한 열망엔 모종의 ‘사건’ 이후 어떤 변화가
◇Y/N/에스더 이 지음·최리외 옮김/260쪽·1만6800원·은행나무
“이 콘서트가 네 삶을 바꿀 거야.”
독일 베를린에 사는 29세 한국계 미국 여성 ‘나’는 어느 날 친구의 제안을 받고 케이팝 아이돌 그룹 ‘팩 오브 보이즈’의 콘서트에 간다. 커다란 공연장엔 다섯 명의 소년이 춤추고 있다.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은 멤버 ‘문’. 금빛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에 분홍색 셔츠를 걸친 문의 모습에 나는 홀려 버린다. 공연장엔 여자 팬 수천 명이 꽉 들어차 있지만, 나는 다른 팬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나뿐일 것이다.”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문이 스무 살 생일을 맞아 팬들에게 직접 쓴 편지를 몇 시간에 걸쳐 필사한다. 문이 라이브 방송을 시작하면 밤낮 구분하지 않고 참가한다. 문이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하자 방황한다. “문은 너의 존재조차 모른다”는 남자친구의 지적을 받고 화나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는다. 나는 문을 만날 수 있을까.
1989년 미국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계 여성 작가의 데뷔작이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올해 주목받은 책 100권’에 선정하며 화제가 됐다. 아이돌에 푹 빠진 화자의 모습은 방탄소년단(BTS) 팬클럽 아미, 아이돌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를 생각나게 한다.
서울에 온 나에겐 기이한 일들이 펼쳐진다. 문이 자주 가던 식당에 갔다가 문의 팬을 자처하는 한 남자를 만나 ‘원나이트 스탠드’(처음 만난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것) 직전까지 간다. 문이 아이돌이 되기 전 활동했던 발레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 한 여자와 만나 토론을 벌인다. 서울을 정처 없이 떠돌며 상념에 빠진다.
사실 나는 문을 만나고 싶지 않다. 현실 속 문을 만나면 자신만의 환상이 깨질까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나는 매일 뻔한 글을 쓰는 통조림 회사 카피라이터의 일이 지겨워 문에게 집착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위선이 무서워 한국으로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욕망은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는 ‘팬픽’(아이돌을 소재로 한 가상 소설)으로 드러난다. 팬픽 속에서 나는 연습생 문을 우연히 만나고, 낯선 여행지에서 문과 대화한다. 수많은 팬 중 하나가 아니라 일대일로 관계를 맺는 상상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서울을 여행하는 나의 모습과 팬픽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탓에 독자로선 이 소설 자체가 팬픽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해외 언론이 이 소설을 환상 문학의 대가인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작품에 빗대 “카프카식 열병”이라 평가한 이유다.
소설 막바지 나는 문을 만나지만 ‘어떤 사건’을 겪으며 깨닫는다. 나는 다른 팬과 다르지 않고,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문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진실을 말이다. 스타를 사랑하는 일은 상상 속에서 무한히 자유롭지만, 관계를 맺는 건 현실의 일이란 걸 작가는 이렇게 보여준다. 관념적인 서술 방식 때문에 읽기가 쉽진 않지만, 사랑의 본질과 아이돌 팬덤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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