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우고는 지난달 5월 17일 열린 제78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 1회전에서 서울컨벤션고에 0-5로 완패했다. 0-3으로 끌려가던 9회초 2점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그리 낯설지 않은 1회전 탈락. 하지만 선수 시절 ‘외로운 에이스’로 불렸던 문동환 상우고 감독(52)은 희망을 얘기했다. 문 감독은 “비록 졌지만 전력이 좋은 서울컨벤션고를 상대로 9회까지 잘 버텼다”며 “전국대회 경험이 많지 않은 우리 선수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당히 전국 무대에서도 좋은 경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감독이 2019년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 상우고는 1년에 1승이나 2승에 머물던 팀이었다. 콜드게임만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요즘엔 주말리그를 포함해 1년에 10승 가까이 올린다. 만년 약체라는 편견을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문 감독의 목표는 우승도, 4강도 아닌 전국대회 16강이다. 누군가에겐 무척 쉬워 보일 수 있는 16강이 문 감독과 상우고의 1차 목표다.
경기 의정부에 위치한 상우고는 창단한 지 약 10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팀이다 보니 중학교 때 잘했던 선수들이 선호하지 않는다. 대부분 유망주들은 일명 야구 명문교 진학을 원한다. 상우고에 입학한 선수들은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서히 실력을 쌓아 한두 경기씩 이기다 보니 점점 끈끈한 팀이 되고 있다.
상우고는 선수층이 두텁지 않다. 1, 2학년들도 실력과 열정만 있으면 주전으로 뛸 수 있다. 1~3학년은 모두 같은 훈련을 소화한다. 문 감독은 “우린 선수들이 정말 착한데다 열심히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며 “결국 내가 더 잘해야 한다. 꿈을 찾아 우리 학교를 찾아온 선수들은 좋은 선수로 키워내야 한다. 지금 1, 2학년들이 잘 성장한다면 내년에는 전국대회 16강을 노려볼 만 하다”고 말했다.
문 감독은 아마야구 시절 최고의 오른손 투수였다. ‘제2의 선동열’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마 무대를 평정했다. 연세대 재학 시절엔 각종 대회 우수 투수상을 휩쓸었고, 1994년엔 아마야구 최우수선수(MVP)에도 뽑혔다. 국가대표에도 단골로 뽑혔다.
하지만 천하의 문동환도 고교 때의 성적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부산 출신인 그가 지역 야구 명문교인 경남고나 부산고, 부산상고(현 개성고)가 아닌 지금은 해체된 동래고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동래고에서 그는 ‘외로운 에이스’였다. 전국대회 예선이 10경기라 치면 그는 8, 9경기 완투를 했다. 쟁쟁한 팀들과의 대결에서 한두 점을 내주면 경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고교 팀들이 출전하는 봉황기를 빼고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출전한 적이 없다. 문 감독은 “상우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고교 때 생각이 많이 난다. 그래서 더 잘 가르쳐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고 했다.
연세대에 진학한 후 그는 새로운 세상을 봤다. 그가 한두 점을 줘도 이길 수 있는 팀에 온 곳이다. 1년 후배 임선동이 들어온 후엔 더 많이 이겼다.
프로 입단 후에도 그의 야구 인생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아마야구 현대 피닉스에 입단한 후 우여곡절 끝에 1997년에 그를 1차 지명한 롯데에 입단했지만 2승 5패 평균자책점 4.85의 부진을 보였다. 계약이 늦어지면서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차이던 1998년 12승을 거두며 다시 에이스의 모습을 되찾았고 1999년에는 17승 4패 평균자책점 3.28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그해 그는 200이닝 가까운 189와 3분의1이닝을 소화했다.
1999년은 롯데가 가장 야구를 잘했던 해 중 하나다. 박정태, 임수혁 등이 버틴 야수진과 박석진, 박보현 등이 포진한 투수진이 모두 좋았다. 그해 롯데는 드림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한화에 1승 4패로 패하긴 했지만 삼성과 7차전까지 치른 플레이오프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포스트시즌 경기로 평가받는다. 문 감독은 “작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LG를 보면서 1999년 롯데 생각이 많이 났다. 모든 팀원이 하나가 돼 승리를 향해 매진하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이후 팔꿈치 부상 등으로 부진에 빠졌던 그가 다시 한번 일어났던 팀은 바로 한화였다. 당시 롯데는 정수근을 두산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영입하면서 문동환을 보상 선수로 보냈는데, 두산은 곧바로 한화 포수 채상병과 그를 트레이드했다. 왕년의 에이스가 축구공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한화 첫 시즌이던 2004년 그는 4승을 거두는 동안 15패를 당했다. 그의 영입에 두 팔을 걷었던 유승안 당시 감독에게 너무 미안해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유 감독은 “올 한 해를 보고 널 데려온 게 아니다. 내년 이후에 잘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따뜻한 그 말 한마디가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2005년 10승 투수로 거듭난 그는 34세이던 2006년 16승 9패, 평균자책점 3.05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최일언 코치에게서 배운 포크볼이 원동력이 됐다. 그해는 ‘괴물 투수’ 류현진이 신인으로 한화에 입단한 해다. 류현진과 문동환의 원투펀치를 앞세운 한화는 그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문 감독은 “구대성, 정민철 등 베테랑부터 류현진 등 어린 선수들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잘해준 시즌이었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잘되는 팀의 전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해는 그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한 해이기도 하다. 2차례나 완봉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면서 그는 무려 189이닝을 소화했다. 내심 200이닝을 돌파하고 싶다는 욕심을 낸 게 문제였다. 이후 그는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2009년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문 감독은 “잘 될 때의 욕심이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선수는 아프지 않아야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데 순간적인 욕심에 그걸 잊었다”며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할때 절대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욕심부리다간 오히려 역효과를 보기 십상”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황금기를 보낸 롯데와 한화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그는 “저녁에 TV로 두 팀의 경기를 종종 챙겨 본다. 두 팀 모두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만년 하위 팀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롯데와 한화에서 모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그는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내가 롯데 선발 투수로 한화를 상대했었다. 당시 한화 타선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며 “1999년 그때처럼 언젠가는 두 팀이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현재 그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고 있다.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해 혼자 살고 있는 그에게는 학생들 및 코치들과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예전처럼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는 운동은 많이 하지 않는다. 집 근처 중랑천을 틈날 때마다 걷고, 선수들이 친 공을 외야에서 모으면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가끔 어깨 상태가 괜찮을 때는 배팅볼도 던진다. 처음 와서는 1시간씩 배팅볼을 던졌지만 요즘엔 큰 마음 먹고 한 번씩 공을 던진다.
야수들에게는 내야 펑고를 치면서 땀을 흘리곤 한다. 문 감독은 “동래고 시절 선수층이 얇아서 내가 4번 타자였다.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홈런을 친 적도 있는 홈런 타자 출신”이라며 웃었다.
고교 야구 지도자가 된 후 지금까지 한 명의 프로 선수를 배출했다. 202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4라운드로 삼성 유니폼을 입은 투수 신정환이 주인공이다. 그는 “더 많은 제자들로부터 ‘저 프로 갑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싶다”며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해 중학교를 졸업한 유망주들이 오고 싶은 학교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우승 역시 그의 로망이다. 그는 선수 시절 뛰어난 실력에 비해 유독 우승 운이 없었다. 1999년 롯데와 2006년 한화에서도 모두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는 “두산 코치 시절 팀이 우승했지만 당시 2군에 있어 그라운드에서 우승의 감격을 함께하진 못했다”며 “고교에서든 프로에서든 언젠가 한 번 우승하는 꿈을 꾸며 매일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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