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600년 전엔 무기… 미로 속 인류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2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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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길을 잃는 즐거움/헨리 엘리엇 지음·퀴베 그림·박선령 옮김/240쪽·2만2000원·궁리


책을 펼치면 한 가닥의 붉은 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실은 페이지마다 각기 다른 모습의 미로로 그려진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글씨가 위아래, 앞뒤가 바뀌고, 글꼴이 휘어지기도 한다. 책의 물성(物性)을 극대화한 독특한 편집 덕분에 미로가 무엇인지 책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인류가 미로에 빠져 온 자취를 각종 신화와 문학, 건축물, 문헌 등을 통해 풀어낸다. 저자는 영국의 작가이자 문학 편집자로, 영국 BBC 퀴즈쇼 작가와 독서 토론 팟캐스트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책의 미로 그림은 글과 별개로 흥미로운데, 하나의 선으로 이뤄진 그림을 주로 그리는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다.

미로는 르네상스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미로의 흔적은 600년 전인 15세기 베네치아의 사제 조반니 폰타나가 ‘전쟁 도구의 서’에 그린 미로 도면이다. 책에는 방사포, 유탄, 공성탑 등 각종 병기들을 묘사한 삽화들이 가득한데 함정의 일부로 미로가 그려져 있다.

이전 시대까지만 해도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단 하나의 길로 이어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미궁’ 관련 건축물이나 도면만 남아 있었다. 저자는 르네상스 이후 신의 뜻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시되면서 미궁과 달리 인간의 선택이 중요한 미로가 발전하게 됐다고 분석한다.

이후 미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애용됐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미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미로인 햄프턴 궁전 울타리 미로 등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수준 높은 조경의 한 분야로 정착됐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나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등은 미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저자는 “미로의 즐거움은 길을 잃고 난 다음 길을 찾는 데 있다. 우리는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된다”고 말한다. 빠르고 정확한 길만 추구하느라 미로에 빠져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게 하는 책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미로#길을 잃는 즐거움#인류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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