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의자 A타입 팝니다! 역시 명불허전. 저는 큰 걸로 바꿉니다. 중고 매물 H 드문 거 아시죠?”
N사가 정보기술( IT) 인재들에게 지급했던 ’의자계의 에르메스‘를 저도 노리고 있었거든요. N사를 MZ가 선망하는 직장으로 끌어올린 인체공학적 워라밸의 상징 아니었겠습니까. 요기 앉아 차르륵 차르륵 미끌어지면 얼마나 일 처리가 빠르겠어요. 지난 해 서울 삼성동 쇼룸까지 찾아가 본 이 의자, 신상품은 180만원 정도. 과연 중고마켓의 가격은?
‘…1원?’ 판매자는 은퇴? 아니면 폐기물 스티커 붙이는 일조차 시간 아까운 코인 갑부… 라는 생각보다 재빨리 매물을 보지 못한 저의 나태함을 먼저 탓해봅니다. ’거래완료’였거든요. 인생에서 뒤처진 게 이것뿐일까요. H의자가 나오면 즉시 알 수 있도록 ‘알림’ 설정을 잊지 않습니다.
‘디자인 거장 L의 소파, 아는 분만 연락 바랍니다. 1년 전에 6개월 웨이팅해서 받았고 아끼느라 거의 바닥에 앉았어요. 아깝지만 이민 가게 돼서 팝니다. 찔러보기 사절.’
유명 인사들의 SNS에 등장하는 그 장엄한 소파를 알아보는 눈은 있으나 돈도, 자제력도 없는 저는 빈티지 가구 사이트에서 L의 사진을 보는 순간 도파민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꼈죠. 2분 전에 본 가볍디 가벼운 H 의자는 이미 잊어버렸고요. H가 미국 공장의 대량생산품이라면, L은 집과 가구의 영혼이니까요. 그러니 중고 가격도 만만찮을 거 같습니다만? 이것도…‘1원?’ 판매자에게 당장 비행기를 타야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요?
중고거래앱엔 1원 짜리가 많습니다. 당근 유니버스(당근과 크림, 번개장터, 중고나라 등 브랜드가 된 중고거래앱들이 형성한 포스트 벼룩시장)에 입문했을 땐 실제로 1원 거래가 이뤄진다고 생각했어요. 불필요한 물건들이 점점 쌓이니까, ‘비움’을 위해서 중고거래에 맞는 형식, 즉 ‘1원’으로 ‘나눔’을 하는 거라고요. 제가 구매한 빈티지 의자의 가격이 거래 직후 1원으로 바뀐 걸 보기 전까지는요.
판매자는 잘 맞는 슈트를 입어 스마트해보이는 남성이었어요. 구매 후기를 보내며 조심조심 물었습니다. “아름다운 의자를 좋은 가격에 주셔서 고맙습니다. 답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만, 제가 산 의자 가격을 1원으로 바꾸신 이유가 있나요?” “세금을 물린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그럼 잘 쓰세요.”
과세당국이 당근을 주시 중이라는 말은 파다했어요. 중고거래가 돈세탁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도요. 한편, 중고마켓에서 새상품을 파는 자영업자들은 엄청 늘었고요. 각자의 사정으로 중고거래자가 거래 후 가격을 ‘1원’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거죠. 과연, 올해 5월 국세청에서 거래액과 빈도를 따져 상위 500~600명에게 ‘종합소득세’ 안내문을 발송했습니다. 하지만 ‘당근했다가 세금폭탄’같은 기사 제목과 달리 중고거래의 실거래액을 파악해 세금을 받아내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적어도 당장은요. 거래는 현금 원칙이고 빠른 판매를 위해 번개장터와 중고나라 등 여러 마켓에 중복 등록하니까 1만 원에 거래한 청바지는 10만 원도 되지만, 1원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전과 편의성 때문에 중고거래에서도 신용카드와 특정‘페이’가 점점 많이 쓰이고 있어요. 뛰는 당근러들을 하늘에서 지켜보는 국세청!
올해 저는 안내문을 받지 못했어요. 이미 세금을 낸 직구 원피스(작게 나왔고), 너무 얇은 침낭(이렇게 추위를 탈 줄이야), 사각형 티테이블(너무 각진 모양) 등을 사자마자 중고마켓에 내놓는 것도 속상한데 ‘소득’세라니요. 당근 유니버스가 확장된 건 이렇게 쓰디쓴 상실감을 윤리적 소비와 이웃과의 나눔이라는 건강한 맛으로 교환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안나 카레니나’를 응용하자면, 모든 성공한 사업은 비슷한 이유를 갖고 있지만, 실패의 원인은 뭐가 될지 모른다는 것. 과연 당근 유니버스의 타노스(‘어벤저스’에서 균형을 맞춘다며 세상 절반을 날려버렸다)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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