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안식처’ 키나발루…주인공은 식물, 인간은 거들 뿐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9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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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와 녹음이 어우러진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 식물원. 멸종위기 식물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비밀의 정원이었다. 간이식당과 숲길 사이를 따라가니 입구가 나왔다.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있어 웬만해선 눈에 띄지 않는 문이었다.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은 섭씨 30도가 넘었지만, 숲으로 이뤄진 정원 안은 24도였다. 동남아시아에 와 있는 것 맞나. 눈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나무들과 계곡물, 새들의 지저귐이 마치 한국의 깊은 산속 같은 청량감을 주었다. 이곳은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사바주(州) 키나발루산 식물원이다.

식물 천국, 키나발루산 식물원

원숭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높다란 나무들과 덩굴식물들, 고사리와 버섯, 신비로운 난초 등이 동남아시아 햇빛과 수분을 함께 머금고 있었다. 식물의 초록빛은 얼마나 다양한 깊이를 가질 수 있나. 온몸이 초록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키나발루산 식물원의 버섯과 이끼류.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키나발루산 식물원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난초를 만날 수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그 초록의 세계에 노란색 능소화(凌霄花) 테코마 스탠스와 말레이시아 나라꽃인 빨간색 히비스커스가 이국의 정취를 더했다. 그런데 분홍색 꽃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메디닐라 스페시오사였다. 작은 꽃들을 원추 모양으로 피워내는 모습 때문에 별명이 ‘화려한 아시아 포도’다. 짙은 보라색 열매는 정원 속 새들에게 소중한 먹이가 된다고 한다. 생태계에서 식물은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단순히 초식동물의 먹이가 아니라 태양과 동물을 연결하고 지구 환경의 균형과 생태적 안정성을 유지해 주는 고마운 존재가 식물이다.

키나발루산 식물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메디닐라 스페시오사.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키나발루산 식물원은 면적 1.4ha(1만4000㎡)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하지만 관광객은 물론 세계 식물학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는 경이로운 ‘식물 천국’이다. 식물원이 자리 잡은 키나발루산(해발 4095m)은 동남아시아 최고봉이다. 총면적 753㎢에 이르는 키나발루 국립공원은 2000년 말레이시아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1000여 종의 난초와 600여 종의 양치류, 326종의 조류와 850여 종의 나비를 비롯해 동식물 5000여 종이 어우러져 사는 생물종 다양성을 인정받아서다. 저지대 딥테로카프 숲에서부터 참나무와 고산식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들이 풍요롭게 공존하는 이곳을 연간 60만 명이 찾는다. 이토록 드넓은 키나발루산의 자연을 압축해 만날 수 있는 곳이 키나발루산 식물원이다.

생물종다양성이 뛰어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키나발루산 식물원.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식물원은 전시 권역을 네 곳으로 구분했다. 일반식물, 약용식물, 난초, 그리고 멸종위기 희귀식물이다. 방문객이 몰리는 보르네오섬 식충식물 네펜테스는 희귀식물이라 주위에 펜스를 둘러놓았다. 아이들이 펜스 밖에서 신기해하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미래 세대를 위해 멸종위기 식물을 보존하는 이 식물원은 단순한 관광지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에코 투어리즘(eco tourism·환경 보호와 지역 발전을 목표로 하는 여행) 장소다.

● 데사 목장에서 만난 지역 사람들

키나발루산은 현지인에게 우리나라 백두산이나 한라산 같은 상징적이고도 영험한 존재다. 키나발루는 원주민 말로 ‘영혼의 안식처’를 뜻한다. 차로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다 보면 등산객을 위한 숙소가 여럿 보인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도 히말라야 등정에 앞서 훈련 삼아 이 산에 오른다고 한다.

현지인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로 통하는 키나발루산. 수트라하버리조트 제공

산길을 오르다가 만나는 마을이 라나우 지역 쿤다상이다. 고산지대여서 기후가 쾌적하다. 매주 열리는 타무 시장에서는 지역민들이 생산한 신선한 농산물과 수공예품을 구매할 수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포링 온천도 여기서 40km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다. 쿤다상에서 현지인에게도 인기 높은 관광지는 데사 목장이다. 넓이 199ha에 이르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목장으로 젖소 1000여 마리가 질 좋은 우유를 생산한다. 말레이시아판 상하 목장이랄까. 데사 목장 요거트 아이스크림은 백미당 요거트만큼이나 맛있었다.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 중턱에 있는 데사목장.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마침 말레이시아 추수감사절인 카마탄(5월 30~31일)이 낀 연휴여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목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인장으로 만든 미니 가든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한쪽에서는 민속 의상을 입은 현지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축제를 즐겼다.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한 현지 여성이 자신이 입고 있던 민속 의상을 건네며 걸쳐 보라고 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하자 이 여성은 옆에 있던 가족까지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건네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미소가 여유롭고 환했다.

데사목장에 꾸며진 미니 선인장 가든.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말레이시아 추수감사절인 카마탄을 즐기던 현지인 가족.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당신을 만난 건 행운”

이번 여행 숙소는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수트라하버 리조트였다. 아침을 먹으러 뷔페 레스토랑 ‘파이브 세일즈’로 향하는 길가에는 여러 종류의 플루메리아속(屬) 식물들이 피어 있었다. ‘러브 하와이’로도 불리는 플루메리아의 꽃말은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다.

선착장을 갖추고 있어 요트를 타고 바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수트라하버리조트.

‘러브 하와이’로도 불리는 플루메리아의 꽃말은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여행에서 만남은 풍경이든 사람이든 낯설지만 설레는 일이다. 수트라하버 리조트는 요트장을 품고 있어 바로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선셋 투어’를 할 수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섬과 함께 세계 3대 석양으로 꼽히는 코타키나발루 석양은 히잡을 쓴 현지인에게도 감탄의 대상이었다. 석양은 특히 ‘연인들의 아름다운 언어’일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 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사랑하는 코타키나발루의 석양.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리조트의 마리나 컨트리클럽 계단에는 망망대해를 용맹하게 바라보는 금색의 새 동상이 있다. ‘행운의 파라다이스 버드’다. 극락조에 해당하는 이 새는 리조트 메인 콘셉트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의 도전 정신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도전 정신을 상징하는 금빛 새 동상. 수트라하버리조트 제공

리조트에서 바다를 보면 5개의 섬이 시야에 펼쳐진다. 툰쿠 압둘 라만 해양국립공원이다. 그중 마누칸섬으로 향했다. 섬으로 가는 보트 위에서 패러세일링도 할 수 있다. 섬에 도착하니 에메랄드빛 물빛이 일렁였다. 스노클링 장비를 대여해도 되지만 바닷물이 워낙 맑고 깨끗해 물안경만으로도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잘 볼 수 있다.

툰쿠 압둘 라만 해양국립공원에 속하는 마누칸 섬의 해변가.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여행은 때론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지름이 최장 1m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 라플레시아를 봤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1년에 약 일주일만 꽃을 피운다는 라플레시아를 보지 못했다. 리조트 식당 식탁에 놓인 라플레시아 장식품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하긴 이런 게 여행 아닐까. 다음을 위한 어떤 소망이나 약속을 품는 것…. 그 대신 이국의 열대림에서 숲의 마음과 새소리를 읽고 들은 것 같다. 지속 가능한 인류의 번영을 위해 다양한 생물종을 지켜내야겠다고, 그 생명의 가치를 미래 세대에게 일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키나발루산에서 만난 모든 생명체 여러분, 당신을 만난 건 행운입니다.”



글·사진=코타키나발루=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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