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로 색색의 물감이 커다란 점으로 찍혀 있다. 배경이 불투명하게 비치는 물감은 붓이 움직인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관람객은 캔버스 앞에 서 있었을 작가의 모습을 그려본다. 붉은 물감은 위에서 아래로, 푸른 물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초록 물감은 아주 가볍게 터치하고….
일본의 미술가이자 비평가, 건축가인 오카자키 겐지로(68·사진)의 신작 회화가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개막한 오카자키의 개인전 제목은 ‘형태의 지금과 이후(이금이후·而今而後)’. 회화 및 조각 작품 20여 점을 페이스갤러리 서울 2, 3층 공간에 걸쳐 볼 수 있다. 이 중 시를 쓰듯 화려한 색채를 겹겹이 나열한 추상 회화에 대해 오카자키는 “뇌경색 투병 후 스스로에게 더 자유로워진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2년 전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었을 때 저는 ‘운이 좋게도’ 뇌경색에 걸렸습니다. 오른쪽 팔다리를 못 쓰게 됐지만, 이때 논어의 ‘이금이후’를 생각했지요. 평생 몸을 다칠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는데 죽을 때가 되니 그간 다치지 않음을 깨닫고 오히려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재활 치료를 받고 이제는 이전의 15배 속도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면 걱정이 생겨난다’고 한 그는 캔버스 위에 각기 다른 자신만의 시간을 펼쳐 놓는다. 한 작품은 여러 개의 패널로 나뉘고, 그 안의 형태들도 그려진 시간이 모두 다르다. 어떤 구역은 몇 주 만에, 다른 구역은 몇 달 만에 그렸다. 그렇게 캔버스와 맞닿은 순간 자체에 집중한 물감 흔적들이 있는 각 패널을 나중에는 작가가 원하는 순서로 조합한다. 작가는 “패널마다 그 크기에 맞는 길이의 글이 있다”고 했다.
패널과 연관된 글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제목이다. ‘완전히 그려진 원은 시작점으로 돌아가고 곡선은 멈춘다. 노을을 맞으며 새들은 날개를 접고, 인간은 할 말을 잃는다. 지구를 밝힌 태양은 사라지지만(…)’처럼 4개의 패널로 구성된 대형 캔버스 회화는 9개의 문장으로 구성된다. 작품의 제목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붙여진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오카자키는 이렇게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는 작품 활동뿐 아니라 ‘임팩트로서의 추상’(Abstract Art as Impact) 같은 평론과 미술사 연구 활동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2018년 출간한 ‘임팩트로서의 추상’은 2019년 일본 문부과학상을 받았으며, 나와 고헤이 등 일본 인기 작가가 스승으로 꼽았다. 다음 달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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