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용한 동네, 서점이 문을 열었다. 아늑한 분위기에 손수 내린 커피도 마실 있는 곳. 서점을 운영하는 영주는 처음엔 넋 놓은 채 앉아 있었지만 차츰 생기를 찾는다. 사람들도 하나 둘 모여든다. 취업에 연이어 실패한 후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민준,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부당한 대우에 분노해 회사를 그만 둔 후 명상과 뜨개질을 하는 정서,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고교생 민철…. 이들은 조심스레 서로에게 다가가고, 가슴 속 응어리와 고민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이하 ‘휴남동 서점’)는 드라마틱한 서사는 없지만 어쩌면 어느 동네 서점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렸다. 등장인물들은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서로를 통해 조금씩 나아갈 힘을 얻는다.
황보름 작가(44)가 쓴 이 소설은 2022년 1월 종이책으로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올해 6월 말까지, 2년 5개월간 국내에서 30만 권 넘게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지금도 매달 3000권 넘게 나가고 있다. 25개국 이상에서 판권이 판매됐다. 영국, 일본, 브라질에서는 각각 3만5000권 넘게 나갔다. 올해 4월 일본 서점 대상 1위(번역 소설 부문)를 했다.
황 작가를 3일 전화 인터뷰하고 출판사 클레이하우스의 윤성훈 대표(40)를 경기 파주시에 있는 클레이하우스에서 2일 만났다. 교보문고를 비롯해 국내 주요 서점에서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한 클레이하우스는 뜻밖에도 1인 출판사였다.
컴퓨터공학과를 나온 황 작가는 LG전자에 입사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7년간 일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 ‘난생처음 킥복싱’,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를 출간했지만 그리 주목받진 못했다. 10년 가량의 작가 생활을 접고 2021년 다시 회사에 들어갔다. 어느 날, 밀리의 서재와 브런치가 주최한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 수상작으로 ‘휴남동 서점’이 뽑혔다는 연락을 받는다. 에세이가 잘 써지지 않아 ‘도망가자는 마음으로’ 쓴 첫 소설을 공모전에 출품해 ‘잭팟’을 제대로 터뜨린 것. ‘휴남동 서점’으로 황 작가는 다시 전업 작가가 됐다.
황 작가는 소설 쓰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재능이 뛰어나 장편 소설을썼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작법을 배울 때 단편 소설을 먼저 쓰고 그 다음 장편 소설을 쓰잖아요. 저는 그런 과정 없이 장편 소설을 썼으니까 재능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혼자 이야기 만드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한 번 드라마에 빠지면 대사를 포함해 모든 요소를 ‘나노 단위’로 파악할 정도로 몰입해요. 새로운 에피소드로 구성된 별도 회차를 혼자 만들 정도로 드라마에 푹 젖어들어요. 소설은 이야기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소설을 쓰는 기본 틀을 모르니까 자유롭게 쓸 수 있었죠.”
초고를 쓰는 데 4개월 정도 걸렸다.(이후 퇴고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자아내온 경험이 쌓이고 다져져 장편 소설을 단숨에 폭발하듯 써낼 수 있었으리라.
“각 캐릭터의 이미지를 정하고 제가 정한 반경 안에서 캐릭터가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하게 했어요. 이 인물이 말을 툭 던지면 상대방도 캐릭터에 맞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반응이 오가는 과정이 진짜 재밌었어요. 캐릭터들과 이야기가 점점 저를 이끌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죠.”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후 종이책으로도 출간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이어졌다. 당시 밀리의 서재는 지금과 달리 자체적으로 종이책을 만들지 않았다. 이에 출간을 제안한 곳은 2021년 문을 연 1인 출판사였다. 윤 대표는 “밀리의 서재와 프로젝트를 논의하던 중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규모 있는 출판사도 많은데 왜 클레이하우스를 선택했을까. 윤 대표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이해가 된다. 2009년부터 웅진지식하우스, 인플루엔셜, 다산북스에서 편집자로 일한 그는 숱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다산북스에서 팀장을 맡아 팀원들과 함께 펴낸 책이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야마구치 슈 지음·김윤경 옮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전승환 지음)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김수현 지음)다. 이들 책은 모두 20만 권 넘게 판매됐다. 그는 “어떤 마케팅을 할 지 답이 보이는 책을 기획한다”고 말했다.
‘휴남동 서점’은 작품이 지닌 매력이 크다. 마케팅도 효과적이었다. 기자는 당시 “잡화점 백화점 편의점…이번엔 서점이다!”는 홍보 문구를 보고 감탄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 지음·양윤옥 옮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지음),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지음)을 떠올리게 하며 ‘휴남동 서점’을 이들 대형 베스트셀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품으로 여기게 한 것. 신간을 ‘빅4’로 엮은 카피와 주요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홍보 문안을 배치한 점은 인상적이었다.(황 작가는 “윤 대표의 감각에 놀랐다. 한편으론 민망하고 걱정도 됐다. ‘사람들이 과연 이렇게 생각할까?’ ‘저들 책 정도로 호응이 없으면 어쩌지?’하며 고민했다”고 말했다.) 서점을 찾은 이들 상당수가 ‘휴남동 서점’을 살펴보는 모습을 봤다. 이에 출판사 이름은 생소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일 거라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윤 대표는 “서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기에 서점을 찾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해 가장 돋보이는 곳에 홍보 문구를 배치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처럼 호응이 클 줄은 몰랐다고 했다.
“책이 정말 재미있어 단숨에 다 읽었어요. 참 따뜻하더라고요. 손익을 따지기 전에 반드시 제가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윤 대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문학청년’이 그를 뒤흔들었다. 연세대에서 영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소설가를 꿈꿨다. 대학생 때 장편소설도 두 편이나 썼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소설쓰기’ 수업을 들으며 소설가는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강 선생님은 제 글을 보시고 조용조용 팩트만 말씀해주셨어요. 다 맞는 말이었죠. 너무 설득되더라고요. 그래서 깨끗이 접었습니다.(웃음)”
편집자가 된 후 소설책도 펴냈지만, 1인 출판사를 만들 때 소설책은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문학전문 대형 출판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남동 서점’은 이런 결심을 곧바로 바꾸게 만들 정도로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그가 예상한 판매량은 1만 권이었다고 한다. “종이책으로 출간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실제 종이책 판매로 이어질지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책이 정말 좋아서 무조건 내기로 했죠. 출판사를 세운 후 네 번째 책이었어요.” 베테랑 편집자였지만 막상 출판사를 차리고 보니 세 번째 책부터는 겁이 났다고 한다.
“몸담았던 출판사에서 즐겁게 일했어요. 다만 조직이 크다 보니 의사 결정을 하는데 시간이 걸려 제가 만들고 싶은 책을 바로바로 내고 싶어서 출판사를 세웠어요. 김선식 다산북스 대표님이 ‘잘 하겠지만, 2년 해보고 안 되면 돌아와라’고 하셔서 마음 편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여러 지원도 해주셔서 큰 힘이 됐습니다.”
그래도 대표로서 책임져야 할 무게감은 컸다. 다행히 ‘휴남동 서점’은 독자 반응이 곧바로 왔다.
“출간 후 2, 3주 지났을 때 황 작가님에게 ‘10만 부 가뿐히 넘어갑니다!’라고 말했어요. 제 희망이 반영된 숫자이기도 했고요.(웃음) ‘휴남동 서점’의 성공 덕분에 출판사를 운영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겨 안심이 되고 자신감도 생겼어요. 국내 문학 작품으로 1인 출판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의미 있고요. 밀리의 서재와 브런치(카카오)라는 대형 플랫폼이 적극적으로 책 홍보에 나선 것도 도움이 많이 됐죠.”
판권 수출은 윤 대표도 예상치 못했다. 영국 유명 출판사 블룸스버리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지음)를 출간해 성공한 뒤 또 다른 한국책을 찾던 중 ‘휴남동 서점’를 선택한 것. 지난해와 올해 런던도서전에서 블룸스버리는 ‘휴남동 서점’을 크게 홍보했다. 영어책 판매 물꼬가 트이자 일본 대만 말레이시아 스페인 브라질 폴란드 등 각국에서 연달아 판권을 사갔다.
“중동까지 지구촌 대부분의 지역에 수출이 됐어요. 북유럽만 빼고요. 북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잘해서 영어책을 많이 본대요.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등 현지어로 번역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 영어책에 비해 가격 경쟁력에서 밀린다고 해요. 그래도 북유럽까지 진출해 보고 싶습니다.”(윤 대표)
황 작가는 해외 독자의 반응이 국내 독자와 비슷해 신기하다고 했다.
“소셜미디어로 소감을 전해오는 해외 독자가 많아요.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는데 책을 읽고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는 말에 너무 감사했죠. ‘우리 동네에도 이런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 독자들도 기억에 남아요. 그런데 책을 읽고 실제 서점을 내신 분들을 만나서 진짜 놀랐어요. 서점을 하고 싶었는데 오랜 시간 망설이다가 책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사는 곳에도 그렇게 서점을 내신 분이 있어요.”
독자들은 황 작가에게 영주를 닮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영주는 저보다 사교적이고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회사를 다니며 블로그를 운영하다 책을 내게 된) 승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쓸 때는 잘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소설을 썼던 그 때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힘을 얻는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황 작가)
황 작가는 소설 덕분에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다.
“영주가 영국 그룹 킨(Keane)의 앨범 ‘호프스 앤드 피어스’(Hopes and Fears)에 빠져 매일 서점에 튼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킨이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우리가 책에 나와 기쁘다’며 감사 인사를 올렸더라고요!”(황 작가)
‘휴남동 서점’은 올해 11월경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정말 기대돼요. 공연장에 가면 분명히 울 거예요. 제가 잘 울거든요. 울지 말자고 벌써부터 다짐하고 있어요.(웃음)”(황 작가)
‘휴남동 서점’은 후속작인 2편이 나올 가능성은 없을까. 윤 대표는 2편을 기대하고 있다.
“영주를 비롯해 여러 인물들이 그 뒤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 하는 국내외 독자들이 많아요. 저는 2편을 냈으면 좋겠는데 황 작가님은 좀 단호하시더라고요.”(윤 대표)
황 작가는 2편 이야기가 머리에 안 들어온다고 했다.
“이대로 끝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욕심으로 2편을 쓰진 말자고 생각해요. 다만, 뒷이야기가 떠오르면 쓰게 될 수는 있을 것 같아요.”(황 작가)
윤 대표는 출판사를 세운 후 지금까지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유영광 지음), ‘마지막 마음이 들리는 공중전화’(이수연 지음) 등 총 22종의 책을 냈다. 그 중 절반은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소설, 인문, 에세이 등 여러 장르를 다루되 마냥 따뜻하기보다 구체적인 답을 줄 수 있는 ‘실용적인 따뜻함’을 전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윤 대표는 “출판은 최소한의 베이스캠프도 없이 해발고도 0에서 등반을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책은 내용이 모두 다르기에 마케팅도 그에 맞게 각각의 방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출판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머릿 속에 그린 일종의 세계관을 책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해외에 한국책을 알리는 것도 보람 있고요.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해서 나이가 들어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되지만 현재에 집중하며 신나게 일하려고 해요. 최근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20, 30대가 많이 와서 책을 보는 모습에 희망도 더 갖게 됐습니다.”
황 작가는 새 소설을 쓰고 있다. 초기 단계여서 내용을 밝히긴 어렵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신뢰할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첫 책을 낼 때 ‘작가로 더 알려진 후 독자들이 이 책을 보고 좋아하면 좋겠다’는 걸 목표로 삼았거든요. 한 권을 읽고 나면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지고, 제 이름으로 나온 책은 어떤 책을 사도 독자들이 흡족하게 여기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2022년)는….
차분한 동네 휴남동에 문을 연 ‘휴남동 서점’. 서점을 운영하고 이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리며 숨 쉴 틈 없이 빡빡하게 살다 지쳐 버린 이들이 서로를 통해 힘을 얻고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영주는 결혼 생활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은 후 깊은 우울감에 시달리다 서점을 연다. 민준은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갖가지 스펙을 쌓았지만 취업에 연달아 실패하고 휴남동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한다. 비정규직은 아무리 애써도 정규직이 될 수 없는데다 업무 성과까지 빼앗기자 회사를 그만두고 명상과 뜨개질에 몰두하는 정서,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무기력감에 빠진 고교생 민철,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남편과 갈등을 겪는 원두 로스팅 가게 대표 지미 등 주위에 존재할 법한 평범한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휴남동 서점에서 천천히 서로를 알아간다. 그리고 차츰 마음을 연다. 서점을 연 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던 영주는 점점 서점 운영에 의욕을 보인다. 민준은 커피 내리는데 온전히 집중하며 바리스타로서 실력을 키운다. 정서는 자신을 잠식했던 분노를 잠재우려 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받아들이는 서로를 통해 응어리를 풀고, 상처를 회복해 나간다.
극적인 요소 없이 차분하게 흘러가는 이들의 일상은 담백하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과 속도로 살아가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걸 가만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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