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가 가득한 다리 위. 지독한 안개 탓에 연달아 자동차 추돌사고가 발생한다. 화마가 치솟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구조용 헬기마저 추락해 다리 양쪽이 끊긴다. 설상가상으로 전투용 개들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든다. 아비규환이다.
통신이 끊긴 상태에서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이는 무전기를 손에 쥔 청와대 행정관 차정원(이선균) 뿐. 하지만 차정원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을 덮기 위해 급급하다. 군에서 전투용으로 훈련 시킨 개에 대해 미쳤을 뿐이라고 둘러댄다. 조금만 기다리면 구조될 수 있다고 토닥인다. 과연 사람들은 이 다리 위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12일 개봉하는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바다 위에 설치된 거대한 다리가 최악의 안개로 고립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재난 영화다. 자동차가 연쇄 추돌하고, 구조용 헬기가 다리 위로 추락하는 장면은 실제 재난 상황을 보는 듯 실감 난다. 사고를 수습하려고 현장을 찾은 견인차 기사(주지훈)의 유머가 곳곳에서 긴장감을 풀어준다. 제작비 185억 원에 달하는 여름 텐트폴(거액의 제작비와 유명 배우를 동원해 흥행을 노리는 작품)로 손색이 없다.
영화는 배우 이선균이 지난해 12월 세상을 뜬 뒤 처음 공개되는 유작이다. 2022년 촬영돼 지난해 5월 제76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지만, 1년 2개월이 지나서야 국내에서 개봉된다.
영화를 연출한 김태곤 감독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선균이 형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도 연출하면서 놓친 부분이 있는데 형이 캐릭터 감정이나 동선에 대해 의견을 많이 줬다”고 술회했다.
이선균의 연기는 그의 과거 출연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향해 냉소를 풍기는 차정원의 모습은 영화 ‘기생충’(2019년)에서 자신의 운전기사를 무시하는 ‘박동익’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생존을 위해 죽기 살기로 달리는 모습은 영화 ‘끝까지 간다’(2014년)에서 그가 연기한 형사 ‘고건수’와 겹친다. 드라마 ‘파스타’(2010년), ‘나의 아저씨’(2018년)로 널리 알려진 이선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다음 달 14일에는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행복의 나라’가 개봉한다. 이선균은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 역을 맡았다. 유작들의 연이은 개봉은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마지막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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