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3일 열린 부대 학술행사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
한국 조경 50년 역사를 대표하는 정영선 조경가(83)는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올해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사상 처음으로 조경가의 역대 작업을 조망하는 전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9월 22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요즘 하루 1200명 이상의 방문객이 다녀간다.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도 개봉 3개월 만에 2만 명 넘는 관객이 관람했다. 국내의 친숙했던 공간들이 ‘정영선 표 조경’으로 완성됐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3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부대 학술행사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는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정영선 현상’을 짚어볼 수 있는 자리였다.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시대 정신을 품는 정영선의 서사는 기후 위기의 지구를 돌보고 우리 것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공감을 넘어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배정한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정영선의 조경 세계를 세 개의 변곡점으로 설명했다. 첫째는 서울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1986년)이다. 1973년 시작된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의 제1호 졸업생인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 조경 설계의 교본을 제시했다. 둘째는 그의 전성기를 열게 된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년)이다. 주변과 관계를 맺는 경관 경험을 극대화하면서 정원을 조경의 영역으로 다시 불러냈다. 서울 아산병원과 제주 오설록 등 탁월한 미감의 정원들이 잇따라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으로 선유도공원(2002년)은 폐정수장의 흔적을 살려내면서 한국 조경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배 교수는 “정영선의 작업이 ‘땅에 쓰는 시’가 된 것은 감상적 낭만이 아니라 땅을 읽어내고 연결시키는 태도에 있고, 그 태도가 경관을 이뤄냈다”고 평했다.
김아연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는 “정영선의 작업이 푸른 유산으로 남을 것인가 혹은 대한민국 조경 1세대의 예외적 사례로 기억될 것인가는 다음 세대의 실천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리 자생식물들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던 정영선 조경가와 달리 요즘 세대는 화려한 컴퓨터 조형 설계와 인스타그램을 겨냥한 풍경 만들기에 취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현재 전국의 정원 조성사업에는 우리 땅에 대한 철학과 지구에 대한 위기의식이 빠져 있는 것 같다”며 “돌봄의 단어가 돼야 할 정원이 행정의 단어로 변해 전 국토가 정원 테마파크로 변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후배 조경가들은 ‘정영선의 정신’을 이어받아 발전시키자는 발표를 했다. 박승진 디자인스튜디오 로사이 소장은 “미국 뉴욕 원다르마센터를 설계하러 함께 현장에 갔을 때 땅이 워낙 좋아 거의 건드리지 않고 길만 냈다”며 “풍경으로서의 땅 자체를 보존하는 것은 굉장한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전은정 조경포레 소장은 “정영선 조경가는 늘 협업에 있어 포용적이었기 때문에 경계를 넘나드는 성과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조용준 CA 소장은 정제된 분위기의 선유도공원, 백규리 현대엔지니어링 건축조경팀 매니저는 한국의 대청마루와 숲속을 연상시키는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을 예로 들며 조경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호영 HLD 소장은 “‘정원은 자연을 보살피는 것’이라는 정영선 조경가의 뜻을 새겨 우리 생태를 치열하게 지켜내야겠다”고 말했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오른 정영선 조경가는 “우리 국토는 하나님이 만드신 정원인데, 요즘 각 지자체가 산꼭대기까지 계단을 만들며 훼손시키고 있는 걸 보면 뭘 어쩌자는 건지 눈물이 난다”며 “이번 전시와 학술행사가 우리가 자연을 바르게 사랑하도록 도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함께 대담을 진행한 조경진 교수는 “한국의 불안정한 조건을 정영선 조경가가 개인 기량으로 돌파해왔지만, 이제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개선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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