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 한 작품 완성하는 과정이 노동이고,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지를 자르고, 붙이고 하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저는 의식(儀式)이라고 말합니다. 노동으로 의식을 진행하면서, 명상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서정민 작가(63·사진) 작품을 사진으로만 봤다면 단순한 추상 회화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그의 작품을 직접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디지털 시대에 손끝으로 전달되는 아날로그식 노동과 땀의 흔적이 마음을 뒤흔든다.
미국 뉴욕에서 ‘한지(韓紙) 콜라주’ 작품 전시를 하는 등 해외에서 각광받는 서 작가. 최근 경기 남양주 서호미술관과 전북 전주 교동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2000년대 중반부터 물감을 재료로 하는 평면 회화를 버리고, 한지 토막을 활용한 입체적 추상 작품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서예가들이 습작한 서지(書紙)를 수집한 뒤, 고유의 두루마리 기법을 응용해 한지를 말고 자르고, 붙이고, 쪼개는 행위를 반복해 한지 토막을 만든다. 이런 종이 뭉치 수천 개를 콜라주 기법으로 수없이 이어 붙여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다시 조각칼로 깎고 덜어 낸다. 한 작품을 완성하려면 5, 6개월간 10여 단계 공정을 거쳐야 하는 노동의 결과물이다.
“한지는 섬유질이 들어 있어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종이입니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갈아 만든 나무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1000년을 가지요. 특히 한지에 쓴 글씨는 필법과 운율이 기운생동(氣韻生動·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생한 느낌)을 자아내고 소통을 상징합니다.” 경기 파주에 있는 그의 작업실 선반에는 서예가들이 연습한 서지가 쌓여 있다. 또 자신이 직접 고안하고 만든 목공기계들이 가득해 목수의 작업실을 방불케 한다.
그의 작품 화두는 ‘선’이다. 그는 글씨가 쓰인 한지를 먹빛 머금은 가느다란 선들로 재탄생시킨다. 그에게 선은 불교 수행을 뜻하는 선(禪)으로, 또는 청나라 화가 석도(石濤·1641∼1720)의 ‘일획론(一劃論)’에서 한 번 그음을 의미하는 선(線)으로도 해석된다. 특히 작품 ‘선(Line) 39’는 무수히 많은 별이 궤도를 돌고 있는 선의 궤적처럼 보인다.검은색 둥근 원 가운데에는 한 줄기 흰색 물감이 물방울처럼 떨어진다.
“태초에 우주가 시작될 때 지구는 불덩어리였다고 합니다. 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 내리는 한 줄기 빛은 우주의 시작을 의미하죠. 우리 회화에서 근원점이 되는 빛줄기가 무엇인지, 현대 미술의 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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