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1918년 잡지 ‘여자계(女子界)’에 실린 나혜석의 소설 ‘경희’ 중 한 구절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까지 가서 공부했지만 “계집애를 가르치면 건방져서 못쓴다”는 차별에 시달리던 경희. 소설은 경희가 여자이기 전에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끝난다. 106년 전 글 쓰는 여성의 등장을 알린 근대 문학 작품이다.
나혜석부터 한강까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까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여성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엮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민음사·총 7권)이 나왔다.
9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편저자 중 한 명인 김양선 한림대 일송자유교양대 교수는 “우리에겐 왜 ‘노턴 여성문학 앤솔로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을까 하는 질문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1985년 미국에서 출간된 ‘노턴 여성문학 앤솔로지’는 여성 작가들의 영문 작품을 모은 선집으로, 영미권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된다.
기존 국내 여성문학 선집의 장르가 소설에 한정된 것과 달리 신간은 소설, 시, 희곡뿐만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독자 투고, 노동 수기 등 다양한 글을 망라했다. 모든 작품은 당대 원문과 더불어 읽기 쉽게 현대어 표기도 함께 실었다.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군소 작가로 취급돼 온 여성 작가들 가운데 난민, 이방인, 여성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했다”고 했다.
신간은 여성 글쓰기의 원류를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으로 보고 있다. 나혜석의 ‘경희’가 여성 교양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는 기존 견해보다 20년이나 앞서는 것. 여학교설시통문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신문 투고문이다. 이선옥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는 “해외에서 K문화가 유행하고 있지만 사실 대학에서 문학은 점점 더 주변부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번 선집이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해외에도 번역이 돼서 활용되는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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