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녀로, 매춘부로… 가슴속에 남은 여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11일 03시 00분


[한시를 영화로 읊다]〈85〉기록속의 여인-상상속의 여인(1)


북경으로 가는 조선 사신들은 산해관을 지나 풍윤현으로 가는 길에 진자점(榛子店)을 지나게 된다. 명말청초에는 여성이 건축물의 벽에 쓴 제벽시(題壁詩)가 많았다고 하는데, 1680년 서장관(書狀官) 목림유(睦林儒)는 우연히 진자점 주점 벽에 적혀 있는 시 한 수를 읽게 된다.


시에 덧붙인 내용에 따르면 시인은 스물한 살의 계문란(季文蘭)이었다. 남편이 청나라 군대에 피살된 뒤 포로가 되어 왕씨 장경(章京·하급 무관)에게 팔린 처지였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구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시에선 머리 모양의 변화를 통해 왕조의 교체를 암시하는 한편 부모님의 행방도 모른 채 팔려 가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했다.

목림유는 이 내용을 부사(副使) 신정(申晸)에게 전했고, 신정은 자신의 여행기에 이 사연을 기록하였다(‘燕行錄’). 2년 뒤 사행을 간 김석주(金錫胄)도 이 시를 보고 기록을 남겼는데, 주점 노파의 입을 빌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뛰어난 문재(文才)를 부각시켰다(‘擣椒錄’). 이후 조선 사신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계문란의 자취를 되짚으며 그녀를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영화 ‘말레나’에서 뜬소문으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말레나(왼쪽)를 동정한 이는 그녀를 짝사랑하던 레나토(오른쪽)뿐이었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영화 ‘말레나’에서 뜬소문으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말레나(왼쪽)를 동정한 이는 그녀를 짝사랑하던 레나토(오른쪽)뿐이었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말레나’(2000년)에도 남편의 전사 소식이 전해진 뒤 곤궁한 처지가 된 말레나가 나온다. 말레나는 빼어난 미모로 마을 남자들의 관심을 받지만, 이로 인해 마을 여자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행실에 관한 뜬소문으로 고통을 받던 말레나는 자포자기 상태로 매춘부로 전락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말레나를 사실과 달리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었다면, 조선 지식인들은 계문란을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명청 교체기의 비극을 상징하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연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계문란을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가 청나라로 잡혀간 비운의 여성으로 생각하고 싶어 했다. 일찍이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겪은 치욕을 계문란의 일에 투사하여 공감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말레나를 이해해준 사람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소년 레나토뿐이었지만, 계문란은 조선 지식인 다수로부터 동정을 받았다. 레나토의 상상 속에서 말레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아름다움을 뽐낸 것처럼, 조선 지식인들의 상상 속에서 계문란은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돼 미화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나토는 이후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자신이 아직도 기억하는 여자는 말레나 하나뿐이라고 회고한다. 청나라가 들어선 뒤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계문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200년이 지난 1881년까지도 진자점의 달을 보며 아름다운 계문란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金允植, ‘析津于役集’).

#한시를 영화로 읊다#말레나#계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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