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순한 외모의 한 여자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활보한다. 찰랑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긴 갈색 머리를 휘날리는 뒷모습은 영락없는 요조숙녀다. 백옥처럼 흰 피부와 간드러진 웃음소리 덕에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잠시 붙잡고 전화번호라도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행동이 이상하다. 하이힐이 낯선지 안짱다리로 걷다 자꾸 넘어진다.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는 ‘쩍벌’도 서슴지 않는다. 무심코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 달려 나온다. 대화 중 갑자기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쯤되니 이 사람,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다.
배우 조정석(44)이 31일 개봉하는 영화 ‘파일럿’에서 여장 남자로 돌아온다. 2006년부터 지난 달 23일까지 5개 시즌에 걸쳐 뮤지컬 ‘헤드윅’에서 여장 남자를 연기하며 ‘뽀드윅’(뽀얀 얼굴의 헤드윅)이란 별명을 얻은 그가 다시 긴 속눈썹을 붙이고 대중 앞에 선 것. 그는 17일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헤드윅’ 때문에 여장이 낯설진 않았다. 여자 옷을 입는 순간 내 몸짓이 자연스레 바뀌었다”고 능청을 떨었다.
영화는 남자 조종사 ‘한정우’가 술자리에서 여성 승무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해고된 뒤 여동생으로 변장해 다른 항공사에 취업하는 내용을 다룬 코미디다. 남자가 하루 아침에 여자로 변장해 직장생활을 한다는 설정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조정석은 영화 ‘건축학개론’(2012년)의 납뜩이, ‘관상’(2013년)의 팽헌처럼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로 개연성을 뛰어넘어 폭소를 자아낸다.
이번 여장의 특징은 자연스러움이다. ‘헤드윅’은 완벽한 성전환에 실패한 드래그퀸(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여장 남자) 로커의 이야기라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반면 ‘파일럿’에서 조정석은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입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를 연기한다. 여장한 뒤 거리를 자신 있게 걸어가는 한정우의 모습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2006년)에서 성형 후 자신감을 얻은 강한나(김아중)처럼 전형적인 한국 미인으로 보인다. 조정석은 “‘헤드윅’에선 화장을 진하게 했다면 ‘파일럿’에선 자연스럽게 변신했다”고 했다.
영화를 위해 조정석은 체중 7kg을 감량했다. 끊임없이 턱을 지압하고 마사지해 날렵한 턱선을 만들었다. 촬영 전 100벌 이상의 옷을 입어보며 어떤 의상이 어울릴지 고민했단다. 조정석은 “옷 입으면 1단, 화장하면 2단, 가발 쓰면 3단 변신이 완성됐다. 3단 변신 후 모습은 내가 봐도 예뻤다”고 말했다.
영화 속 여장 과정도 볼거리다. 남자인 한정우가 여자로 변신하기 위해 다리털을 제모하기 위해 왁싱숍을 찾았다가 고통에 몸부림 치고, 테이프로 사타구니를 가리는 이른바 ‘공사’ 장면은 관객에게 웃음을 안긴다. 조정석은 “미국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노년의 여성 가정부로 변장하는 코미디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1994년)를 보며 연기를 연습했다”며 “여장을 희화화하지 않으려 했다”고 했다.
영화는 여장 남자의 삶을 비추며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이끈다. 한정우는 여장 후 남성 조종사 서현석(신승호)에게 추근거림을 받으며 과거 자신의 성희롱을 반성한다. 회식에서 성희롱에 시달리는 여성 조종사 윤슬기(이주명)와 대화하며 여성이 마주한 고민을 공감한다. 조정석은 관객 942만 명을 동원한 영화 ‘엑시트’(2019년)의 주인공 ‘이용남’처럼 웃음에서 시작하지만 후반에 이르러 감동을 안긴다. 영화를 연출한 김한결 감독은 “늘 자신을 위한 선택만 해왔던 사람이 특별한 경험 이후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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