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시대, CD같은 사랑[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23일 11시 00분


CD를 굽던 시절이 있었다. 토스터에 굽는 것도 아니요, 프라이팬에 볶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좋아해 줄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 곡 한 곡 노래를 내려받은 다음 한 사람만을 위한 CD를 만드는 일이다. 이 행위는 광학 저장매체인 CD에 레이저를 쏘아 표면을 ‘구워’ 데이터를 저장한다고 하여 영어로나 한국어로나 굽는다(‘Burn CD’)는 표현을 얻었다. 실제로 막 구워져 나온 CD는 따끈따끈하기도 했다.

CD를 구워본 적 없는 2000년대생이 상상하는 ‘Burn CD’의 모습. 이제 CD를 굽는다는 표현은 세계적으로 ‘구식’이 되었다. How To Geek 캡처

MP3와 CDP의 과도기, 나는 장시간 차를 모는 아빠를 위해 CD를 구웠다. 아빠가 좋아하는 이문세와 김광석, 이상은의 옛 노래와 내가 좋아하는 빅뱅, 소녀시대, 2PM 등 아이돌 노래를 함께 버무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함께 좋아해 줄 타인을 상상하며 CD를 굽고, 반짝이는 CD 표면 위에 플레이리스트를 네임펜으로 손수 적었다. 그 시절 음악은 만질 수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 그래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MP3가 퍼지기 시작하더니, 음악을 실시간으로 재생해 듣는 스트리밍 시대가 열렸다(나는 중3 때 처음 MP3를 샀다). 머지않아 MP3는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갔다. CD 최후의 보루 자동차마저 CDP를 없앴다. 이젠 알고리즘이 내가 듣는 음악의 경향성에 따라 내 입맛에 맞는 노래를 추천하는 시대. 어쩐지 요즘 듣는 음악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음악에도 쉽사리 마음을 못 주겠는 거다.

2000년대까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직접 구운 음악 플레이리스트 CD를 선물하고는 했다. CD를 굽던 시절의 사랑법이었다. 출처 핀터레스트
2000년대까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직접 구운 음악 플레이리스트 CD를 선물하고는 했다. CD를 굽던 시절의 사랑법이었다. 출처 핀터레스트
그러다 2주 전, 서로에게 CD를 구워주곤 했던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간 날. 아무 생각 없이 거실에 앉아 유튜브 쇼츠를 보며 낄낄거리다 문득 친구가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노래 한 곡을 틀었다.

제목은 ‘아침만 남겨주고(가수 김현창)’. 기타 선율에 조곤조곤한 낮은 목소리. 사랑하는 이가 슬픔에 겨워 잠 못 이루는 밤. “네가 되어서 가라앉는 맘/밤새 대신 울어주고/볕이 드는 아침만/남겨주고 싶어요”라는 노랫말. 멜론과 유튜브 뮤직이 자랑하는 음악 추천 기능이 내게 단 한 번도 추천한 적 없던 미지의 노래가 그 순간 내게로 왔다. 눈을 감고 노랫말을 곱씹고 있던 내게 친구는 말했다.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건 겨울이었어. 이 노랠 들으면 그해 겨울의 온도와 습도가 전부 기억나.”

가수 김현창이 2020년 9월 발매한 앨범 ‘내 파랑은 항상 검정에 무너져왔어요’. 사진 출처 멜론 캡처
가수 김현창이 2020년 9월 발매한 앨범 ‘내 파랑은 항상 검정에 무너져왔어요’. 사진 출처 멜론 캡처

노래는 이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살다 홀로서기를 택한 2020년 9월 처음 나왔다. 아직은 내 집 같지 않은 낯선 방,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는 친구에게 가뜩이나 겨울밤은 더 길게 느껴졌을 텐데. 그해 겨울 친구는 이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을까. 포근한 노랫말이 친구를 잠재워주었을 거라 생각하니, 노래가 괜히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출근길 노래를 반복해 듣다 친구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다. “너에겐 겨울인 이 노래가 내겐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아.”

유행가도, 틱톡에서 뜨는 배경음악도 아닌 이 노래를 다들 어디서 알게 된 건지. 멜론 댓글 창엔 이 노랠 처음 알려준 이들에 대한 사연이 빼곡했다. 그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글 하나.

“이거 네가 추천해줬던 노랜데, 오랜만에 들으니까 감정이 확 오네. 요즘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잠을 잘못 자는데 새벽에 혼자 깨어있을 때면 너 생각이 나. 너도 잠 못 잤는데. 지금도 안 자고 있을 것 같아. 잘자, 보고 싶어, 연락하고 싶어. 좋은 노래 추천해줘서 고마워. 이 노래 들으면 너 생각은 평생 나겠다. 네가 우리 사이 끝나도 너 평생 기억해달라고 했었는데.”

가수 김현창의 ‘아침만 남겨주고’에 남겨져 있는 댓글 하나. 이 노래를 처음 추천해 준 전 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묻어난다. 멜론 캡처
가수 김현창의 ‘아침만 남겨주고’에 남겨져 있는 댓글 하나. 이 노래를 처음 추천해 준 전 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묻어난다. 멜론 캡처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준 노래엔 그가 건네준 따뜻한 말 한마디의 온기가 담겨 있는 걸까. 어떤 노래는 누군가와 함께 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또 어떤 노래는 그 사람 자체가 되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순위권 밖을 한참 벗어나 있는 이 노래는 음악을 추천해 주는 AI엔 관심 밖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노래엔 이미 3만4665개의 하트(좋아요·멜론 기준)가 눌려 있었다. 이제 더는 CD를 굽지 않는대도, 음악이 ‘만질 수 없는 것’이 됐대도. 어떤 노래는 여전히 알음알음 마음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

줄줄이 이어진 댓글과 ‘좋아요’들. 겹겹이 포개어진 마음의 흔적들 위에 나도 하트 하나를 더 보탰다. 검지로 스마트폰 위 앨범 화면에 하트를 누르고 나니, 어쩐지 이 노래는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소소칼럼#cd#mp3#cdp#아침만 남겨주고#김현창#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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