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 작가 신작 그림책 ‘춤을 추었어’
QR코드 찍으면 흐르는 볼레로 맞춰… 책장 넘기다보면 시각적 환상 느껴
“아날로그인 그림책을 디지털 작업… 장르 다른 분야 결합하며 재미 더해”
희디흰 뺨에 검댕을 묻힌 아이가 눈을 뜬다. 눈엔 분홍빛 선율이 어려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볼레로 선율. 아이는 춤을 추며 사마귀, 물고기, 나비와 만나고 이 모두와 친구가 된다. 그러다 쾅. 느닷없이 전쟁이 터진다. 익숙한 풍경이 속수무책으로 바스러진다. 아이는 살아남지만 상흔이 남았다.
그림책이 아니라 짧은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다. 이수지 그림책 작가(50)의 신작 ‘춤을 추었어’(안그라픽스) 얘기다. 24일 서울 광진구의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건축된 지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 상가 건물 4층에 있는 공간에는 그림책 등이 빼곡했다. 신간의 착상은 어떻게 나왔을까.
지난해 10월 평소처럼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던 작가는 눈이 번뜩 뜨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전날 서울 여의도에선 불꽃축제가 열렸다. 어떤 오류에선지 인터넷 기사의 사진에 불꽃축제가 들어갔는데 아래 사진설명 제목엔 ‘이스라엘 하마스 대대적 포격 시작’이 달렸다. 이 작가는 “아이언돔이 밤하늘에 그리는 궤적이 불꽃놀이와 기가 막히게 흡사하다”며 “한 곳에선 사람이 죽어가는데 다른 곳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전쟁과 축제의 공존이라는 모순적 현실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전작 ‘여름이 온다’에서 비발디의 음악을 입힌 그는 이번엔 모리스 라벨의 춤곡 ‘볼레로’를 갖고 왔다. 드럼 소리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시작해 점점 고조되다가 마지막에 ‘쾅’ 하는 대목에서 폭죽이 터지고 잔해가 떨어지는 듯한 시각적 환상을 느꼈다고. QR코드로 음악을 들으며 책장을 넘기면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부산행’ 등을 맡은 장영규 음악감독이 편곡을 맡았다.
여기에 1분 내외의 애니메이션 18개를 대체불가능토큰(NFT)으로 제작해 그림책의 외연을 넓혔다. 배경음악에 맞춰 폭죽이 터지고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등 그림책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이 작가는 “손에 쥐는 아날로그 매체인 그림책을 디지털화한다는 아이디어가 새로웠다”며 “지금도 서로 다른 장르가 만날 때 걱정보다 ‘재밌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해외에서 K그림책에 대한 호응을 체감하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해외출판 관계자가 농담처럼 ‘혹시 파주라는 곳에 그림책 학교가 있냐?’고 물었다고. 한국 그림책들의 서지정보에 들어간 ‘Paju’라는 단어를 보고,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 이 작가는 “그림책 선진국들은 이미 정점을 찍고 유지되는 분위기라면, 한국은 막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날것’의 좋은 기운이 있다”며 “처음 보는 그림책들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2022년 아동문학계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작가는 그림책, 음악, NFT를 아우르는 새로운 작업을 통해 이번 신간을 냈다. 새 책이 방금 나왔지만 그는 벌써 차기작 구상이 한창이었다. 어린이 그림책을 주로 그려 왔는데 이제는 청소년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농구부 주장이기도 해요. 딸이 농구 하는 모습을 봤는데 굉장히 역동적이었죠. 다음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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