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신’ 상징 정몽주, 이성계 군사참모 활약… 선죽교 피살도 아닌듯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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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펴낸 강문식 교수


고려왕조를 지킨 지조의 상징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전장에서 이성계의 군사참모로 두 번이나 발탁되는 등 오랜 기간 교유를 맺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강문식 숭실대 사학과 교수(54·사진)가 최근 펴낸 ‘정몽주 다시 읽기, 신화에서 역사로’(책과 함께)에 따르면 1380년 8월 이성계는 도순찰사로 황산의 왜적을 토벌할 당시 정몽주를 참모 격인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했다. 1383년 이성계가 여진족 추장 호발도를 격파할 때도 정몽주는 그의 참모로 출전했다.

강 교수는 2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 이후 고위직을 유지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모습을 볼 때 ‘이성계가 정몽주를 고위직으로 이끌었다’는 기록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손잡고 우왕, 창왕 폐위에도 앞장섰다. 특히 창왕 폐위 후 공양왕 옹립을 모의하기 위해 1389년 11월 개경 흥국사에 모인 개혁파 9명 중에는 이성계, 정도전과 더불어 정몽주도 있었다. 권문세족의 부정부패와 민생 파탄을 타개하기 위해선 리더십 교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몽주는 역성혁명이라는 급진 개혁에는 선을 그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막판에 노선을 달리했지만, 사림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된 16세기 후반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예컨대 그가 선죽교에서 피살됐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강 교수는 “태조실록 등에 따르면 정몽주의 피살 장소는 선죽교가 아닌 개경의 태묘동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이방원 앞에서 부른 ‘단심가’ 역시 1617년 간행된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처음 실려 있어 조작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신간은 냉철한 정치가로서 정몽주의 면모도 조명한다. 30년 지기지만 정적이 돼 버린 정도전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모친 혈통에 노비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이용한 게 대표적이다. 강 교수는 “정몽주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면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백성을 위해 고민한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왕조#정몽주#이성계 군사참모#강문식 숭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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