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에 동료인 그는 다짜고짜 전화로 행복을 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듣는 것뿐.
사연은 이랬다. 정확히는, 사연이랄 것이 없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든 것이 괜찮았다. 쑥쑥 잘 크는 아이, 안정적인 직장, 심신의 건강, 별문제 없는 재정 상태. 하지만 “그래서 난 지금 행복한가?”라고 스스로 물으면 선뜻 “응”하고 끄덕여지지 않는 마음. 조금도 불행하지는 않은데, 행복감 역시도 느껴지지 않는 지독한 딜레마.
검고 어두운 한밤의 무더위 속에서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선 꽤 절박한 자문이 이어졌다.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왜 행복하지가 않을까. 행복하고 싶은데, 뭐가 문제일까. 행복은 그에게 언제나 과제였다. 과거엔 노력할 필요조차 없이 수월하게 이뤄냈던 과제가 어느 순간 난제가 되어버린 것뿐이다.
집에 도착해 후끈한 등에서 배낭을 내려놨다. 등덜미가 땀으로 눅눅했다. “인생에 시기라는 게 있지 않을까? 지금은 나 자신보다는 다른 것들을 굴려 가는 게 중요한 때라 그럴지도 몰라.” 세상엔 노력만으로는 잘 안되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라고 우물우물 말을 맺다가 나는 물었다. 아, 혹시 영화 ‘퍼펙트 데이즈’ 봤어?
한여름이면 알록달록 익은 옥수수를 굴려 살피면서 흐뭇해지곤 한다. 연노랑과 샛노랑, 창백한 하양의 낱알맹이들이 도로로록 도열한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일관성 안에서의 리듬감 있는 변주, 규칙 속의 불규칙, 예측 가능성 속의 불가능성. 그런 것들을 한 번 인지하고 나면 일상은 쉽게 지루해지지 않는다.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로야마 씨의 삶이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순서로 채비하고 같은 캔 커피를 마신 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곳에서 식사한 뒤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생활을 ‘수도승’ 같은 ‘엄격한 루틴’이라고 일컫는 이가 많았다. 글쎄. 그런 히로야마 씨라면 완벽하게 루틴을 지킨 날 가장 행복을 느낄까.
다른 한 편에서는 그가 매일 아침 화분에 물을 주고, 매일 출근길 올드팝을 듣고, 매일 밤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며 ‘작은 것에서 얻는 기쁨’으로 ‘완벽한 날들’을 만들고 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소확행’을 추구하며 몰래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었을까.
가만하고 과묵한 그는 무능한 동료가 돈 좀 보태달라며 난리를 쳐도, 가출한 조카가 재워달라며 불쑥 찾아와도, 일상에 예측할 수 없는 비일상이 자꾸만 침투해도 그저 바람에 나뭇잎처럼 잠시 살랑였다가 이내 가만한 미소로 돌아온다.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언젠가 하루하루가 쳇바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야 뭐 회사의 부품이지. 별일? 그런 게 있겠니. 그냥 하루하루가 똑같아. 어제가 오늘 같고, 거기서 거기지 뭐. 오늘이 며칠이더라? 올해도 벌써 다 갔네.
아주 작은 별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그날 한참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너에게 어떤 마음을 담아 무슨 말이라도 건넸을 거야. 무심코 지나쳤을지라도 단 한 구절의 음악이라도 들었을 거야. 일이 잘 안 풀려서 속이 상했든, 운이 좋아서 무언가를 이뤘든, 너의 오늘에는 오직 24시간이라도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그걸 그냥 흘려보내면 너의 오늘엔 텅 빈 쳇바퀴만 남아버리고 말아. 내일도, 모레도 말이야.
히로야마 씨는 점심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하늘을 본다. 오래된 나무의 일렁이는 푸른 잎들 사이에서 깜박거리는 햇빛. 구형 카메라를 꺼내든 그는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우연에 의지해 셔터를 누른다. 과연 어떤 찰나를 찾고 싶은 것일까.
새벽녘에 현관을 나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뒤, 그는 차 시동을 걸기 전 카세트테이프들을 바라보며 몇 초쯤 생각에 잠기다가 하나를 고른다. 시부야의 도로를 지나는 동안 흐르는 올드팝 가사는 묘하게 그의 일상과 닮아있다. 그날의 음악엔 어떤 마음이 담겼을까.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나는 그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의 일상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게 짜인 것 같지만, 마치 알록달록한 옥수수처럼 그 안에는 수많은 변주가 펼쳐지고 있다.
객석의 관객은 히로야마의 삶을 간접적으로 되풀이해 체험하면서 어느 순간 마침내 알아챌 수 있게 된다. 그의 일상은 그저 사소한 루틴의 반복이 아니라,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로 만들어진 세밀한 구성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삶의 주인인 그가 왜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벅찬 얼굴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지를.
밤 9시에 다짜고짜 전화해 행복을 논하던 동료에게.
행복이란 건 기한 내에 이뤄내고 증명해야 할 과제는 아닐 거야. 하지만 적어도 ‘행복하지 않아서 불행하다’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궁금해. 오늘 당신의 하루에는 마음을 담은 시간이 있었는지, 혹은 마음이 가는 순간들이 있었는지. 그 마음의 농도는 얼마나 진했는지, 어떤 중요한 일이기에 당신의 마음이 향했는지 말이야.
그날은 묻지 못했지만, 이런 질문과 생각들이 당신의 행복을 찾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 마음은 마치 자원 같은 거라서, 분명히 쓸 수가 있어. 그 자원을 아끼지 말고 쓸 때만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나는 믿어. 귀히 여기는 일들에 기꺼운 마음을 쏟을 줄 아는 히로야마 씨처럼 말이야.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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