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농부의 딸로 태어난 향랑(香娘)은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돌아와 계모에게 시달리다가 숙부 집에 의탁하게 된다. 숙부의 개가(改嫁) 권유를 거절하고 다시 시댁을 찾아갔지만 남편은 박대하고 시아버지마저 개가를 권하자 결국 강에 몸을 던진다. 향랑의 사연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열녀(烈女)로 국가적 기림의 대상이 되었고, 이에 주목한 많은 문인들이 그녀에 관한 글을 남겼다. 이안중(李安中·1752∼1791)의 시도 그중 하나다.
향랑의 일은 조구상(趙龜祥)이 편찬한 ‘열녀향랑도기(烈女香娘圖記)’에 담겨 전한다. 향랑은 죽을 무렵 자신의 심경을 담아 ‘산유화’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의탁할 곳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죽기로 결심하는 내용이다. 시인은 향랑이 지은 노래가 너무 속되다고 여겨 고쳐 쓰는 한편, 향랑의 마음을 대변한 연작시를 지었다. 시적 화자는 나무와 꽃술의 관계에 빗대 사랑받지 못하여 곤경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막스 오퓔스 감독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년)에서 리사도 바람둥이 스테판에 대한 순정을 간직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영화는 스테판에게 보낸 리사의 편지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플래시백 기법으로 조명한다.
영화는 리사의 편지 내용만으로 전개되는 원작에 비해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강화하여 두 사람의 엇갈린 사랑을 그려냈다. 한시에서도 향랑의 원래 노래와 달리 남편의 변심을 부각시키고 막다른 길에 몰린 향랑의 가련한 처지에 초점을 맞췄다. 한시가 향랑 자신이 부른 노래를 가탁한 것이라면, 영화는 원작과 달리 피아니스트로 설정된 스테판이 연주하는 음악을 통해 사랑의 파국을 암시한다. 특히 리스트의 피아노 연습곡 ‘한숨’을 통해 스테판과 리사의 심정을 드러낸다(한창호 ‘영화와 오페라’ 참고). 영화는 애절한 순애보를 상징하는 여성 캐릭터를 확립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한시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당한 대표적 여성을 통해 감정적 고양을 유발한다.
한시와 영화 모두 원작을 벗어나 감독과 시인의 의중을 드러낸다. 영화에서 리사의 편지를 읽고 난 스테판은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라도 하듯 죽음을 각오하고 결투장으로 향한다. 한시도 향랑의 절개를 강조하기보다 죽음에 내포된 비극성에 방점을 두어 “지금도 향랑의 때처럼 꽃은 피건만(至今花發似娘時)”(마지막 수)이란 애상적 정조로 시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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